계절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찾는 도시, 전주다. 이런 ‘전주’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은 아무래도 ‘한옥마을’이 될 것 같다. 한옥을 입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의 물결이며, 각각의 특색을 지닌 식당이며 카페, 그리고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어서 내국인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있다. 이러한 한옥마을이 유명하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전주는 전통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런 전주는 여러 지역의 답사를 다니는 사람에게 중요하다.
‘전라도’란 이름은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붙인 것이니 전주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주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여러 곳이 있겠지만 한옥마을 주변의 풍남문과 경기전, 그리고 약간 떨어져 있는 전주객사가 전주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 될 것 같다.
▨전주객사=‘전주객사’는 이름처럼 전주에 있는 객사 건물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온 관리가 머무르는 곳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역할이 있으니, 지방의 수령이 임금을 향해 예를 갖추는 ‘망궐례’를 치른다. 객사는 왕궁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해서 일반 관아와 구분해 보기도 한다. 객사는 여러 도시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전주객사 역시 마찬가지다. 전주객사 건물에는 한자로 ‘풍패지관’이라고 적은 커다란 편액이 있다. ‘풍패’는 고대 중국의 나라 가운데 하나인 한나라를 세운 고조의 고향인데,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황제나 왕의 고향을 상징하는 지명이 됐다. 태조 이성계를 가리킬 때 ‘전주 이씨’라고 하니 전주는 조선 왕실의 고향이라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 전주객사를 보면 도시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그 앞에 도청과 시청에 해당하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영 건물이 가득 들어찬 관청 거리가 펼쳐졌었다. 감영의 우두머리는 감사이고 부영의 우두머리는 부윤이다.
▨풍남문=풍남문은 전주를 둘러싸던 전주성의 남문이며 정문이다. 전주성의 성벽 길이는 약 3.2km에 이르렀으니, 지방의 도시를 둘러싼 읍성 중에는 꽤 큰 규모에 속한다. 전주성의 여러 성문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서문은 패서문, 동문은 완동문, 북문은 공북문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동문과 서문, 곧 풍남문과 패서문의 앞 글자를 모아서 보면 ‘풍패’, 곧 객사에서 살펴본 왕의 고향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이를 통해 전주가 조선시대 어떤 느낌의 도시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상징하는 공간이 바로 경기전이다.
▨경기전=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 곧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를 기리는 사당인 조경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은 전주뿐 아니라 영흥, 경주, 평양에도 있었으며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도시마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사당의 이름도 달랐다. 예를 들어 영흥의 사당은 준원전이라고 불렀다.
전주의 경기전은 다른 곳의 사당이 전쟁 등으로 불에 타서 옛 태조의 어진이 사라진 상황에서 어진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지금 태조 어진은 대한제국 시기에 낡아서 다시 그린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태조 이성계의 얼굴을 이해하는 데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다. 경기전 어진 덕분에 우리는 태조 이성계의 얼굴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귀한 역사 자료이다.
어떻게 경기전의 어진은 임진왜란과 같은 위험한 순간을 넘길 수 있었을까. 이 내력을 살펴보기 위해 경기전 영역 안에 있는 옛 전주사고의 모습을 함께 보자.
▨전주사고 터=임진왜란 초기,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그리고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이 왜군을 막으면서 위험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이어지며 전주에도 언제 왜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때 경기전 참봉인 오희길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전주사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의 보호를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조선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으로 서울의 춘추관, 성주, 충주, 전주 등 네 지역에 각각 보관하도록 했다. 혹시 어느 한 곳의 사고에 불이라도 나면 다른 곳의 실록을 참고해 다시 제작해서 조선시대 역사를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한양을 함락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왕실의 주요 서적을 보관하던 창고인 사고(史庫), 네 곳 가운데 세 곳이 불에 타거나 약탈당했다. 곧, 한양의 춘추관, 경상도의 성주 사고, 충청도의 충주 사고에서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이 불에 타거나 약탈당해 사라진 것이다. 만약 전주의 사고에서 보관하던 마지막 ‘조선왕조실록’마저 사라진다면 조선 전기, 200여 년의 역사 기록도 사라지게 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나타난 인물이 손홍록, 안의 두 사람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왔다. 이때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오희길이 이미 실록의 피난처로 봐둔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겼으니, 처음에는 용굴암으로 이후에는 은적암과 비래암으로 다시 옮겼다. 이때 필요한 수십 명의 사람과 비용을 모두 두 선비가 감당했다.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자 내장산에 실록을 두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겨 다시 실록을 옮겼다. 정읍, 아산을 거쳐 황해도 해주, 강화도, 평안도의 안주를 지나 묘향산으로 옮겼으니 ‘조선왕조실록’ 지키기를 나라 지키듯 했다.
이 과정에서 안의 선생은 1596년,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났다. 7년에 이르는 기나긴 전쟁이 끝나자 ‘조선왕조실록’은 손홍록의 곁을 떠나 강화도 정족산성에 보관됐다. 그리고 다시 ‘조선왕조실록’을 여러 부 제작해서 각 지역에 보관하도록 했다. 몇 번의 변화가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서울 춘추관, 강화 정족산, 무주 적상산, 태백 태백산, 평창 오대산의 5곳의 사고에 보관하도록 했다.
▨동학과 서학, 그리고 전주=전주는 객사, 풍남문, 경기전과 전주사고를 통해 조선시대에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주의 위상은 근대에도 이어졌다.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 얼마나 정부에 충격을 주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또 동학농민군은 전주에 ‘집강소’를 설치해 전라도 일대에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이 중심인 정치를 펼쳤다. 풍남문 옆 전동성당도 비슷한 배경 속에서 생겨났다.
1791년, 지금의 충남 금산. 당시 전라도 진산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이 지역에 살던 선비인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다. 대신 천주교 의식에 따라 기도를 올렸다. 이러한 일은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큰 죄였다. 관청에서는 윤지충을 잡아들였는데 조사 과정에서 사촌인 권상연 역시 같은 행동을 한 것이 발각됐다.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은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로 옮겨져 재판받은 뒤 처형당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진산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두 사람이 처형당한 공간을 다르게 보게 됐다.
천주교에서 볼 때 이 장소는 순교의 장소였다. 1891년, 보두네 신부가 이 지역의 땅을 매입한 뒤 1908년에 성당을 짓기 시작해 1914년 완성했으니 바로 전동성당이다. 로마네스크풍의 전동성당은 많은 영화에 등장한 아름다운 건물로 한옥마을 명소 가운데 하나인데, 근대 역사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소로 볼 수 있다.
전주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답게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거기에는 지금과 다른 도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도 있다. 그런데 전주에는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는 사건과 관련된 공간이 있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려는 공간도 있으며, 당시에는 역모에 버금가는 사건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볼 때는 선각자들의 행동, 더 나은 가치를 위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건과 관련된 공간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선으로 보아야 할 다양한 역사의 층위를 가지고 있는 전주, 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방문하면 좋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