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쇼크 이후 10년, 챗GPT의 등장은 이제 인공지능(AI)을 ‘먼 미래’가 아닌 ‘오늘의 현실’로 교문 안까지 들여왔다. 정부는 AI 강국을 선언하며 AI 교육을 서두르고, ‘AI 기반 초개인화 맞춤형 교육’이라는 청사진을 연일 제시한다. 모든 학생이 AI 튜터와 함께 공부하고, 교사는 인간 고유의 영역인 인성 및 사회성 교육에 집중하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교실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 고등학교의 자가진단 결과는 우리 교육현장의 맨얼굴을 여실히 보여준다. 교사의 27%는 여전히 디지털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무선 인터넷 환경은 ‘불안정하다’는 응답이 속출한다. 교사들은 새로운 기술 연수보다 당장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와 수업 준비에 소진(번아웃)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위에서 ‘범용 인공지능(AGI) 시대를 대비한 교육혁신’이라는 거대 담론은 공허한 구호처럼 들리기 쉽다.
이는 정책과 현장 사이의 근본적인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책은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먼저 보지만, 현장은 ‘기술’이 가져올 또 다른 ‘업무 부담’을 먼저 느낀다. 본고는 이 간극을 메우고, AI라는 거대한 손님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현실적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 해법의 출발점은 ‘첨단 기술 도입’이 아니라, 교사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따뜻한 AI 비서’를 제공하는 데 있다.
첫 번째 단추 _ ‘무엇을 가르칠까?’가 아닌 ‘무엇을 덜어줄까’
지금까지의 AI 교육정책은 ‘AI를 활용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집중됐다. 그러나 이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교사가 AI를 낯설고 어려운 ‘학습 대상’으로 인식하는 순간, 혁신은 저항에 부딪힌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로 교사의 어떤 일을 덜어줄 수 있을까?’
교사들의 가장 큰 고충, 즉 페인 포인트(Pain Point)는 수업 외적인 반복 업무다. 가정통신문 작성, 수업자료 제작, 수행평가 문항 출제, 설문조사 결과 정리 등은 교육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지만, 교사의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모시키는 일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는 가장 강력한 ‘업무 조력자’가 될 수 있다.
가령 교사가 AI 챗봇에게 “고1 국어, 윤동주의 ‘서시’를 활용한 1차시 분량의 학습지도안을 만들어줘. 도입-전개-정리 순서로, 모둠토의 활동을 포함해서”라고 명령하면, 불과 수십 초 만에 수준 높은 초안이 생성된다. ‘학교폭력예방교육 가정통신문’ 초안을 ‘정중하고 단호한 어조로’ 작성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이는 복잡한 연수나 고가의 장비 없이, 지금 당장 웹 브라우저만 열면 실천할 수 있는 혁신이다.
교육당국에 제언한다. 거창한 AI 플랫폼 구축 예산의 일부를 돌려, 교사들이 유료 AI 서비스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AI 활용 바우처’를 제공하는 것은 어떨까? 기술 도입 이전에 ‘AI 덕분에 내 일이 편해졌다’는 긍정적 경험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기술 혁신의 가장 확실한 동력이다.
두 번째 단추 _ ‘전면 도입’이 아닌 ‘작은 성공의 확산’
‘모든 학급에 AI를!’과 같은 전면적이고 하향식(Top-down) 정책은 현장의 다양한 맥락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변화를 강요하기 쉽다. 특히 디지털 활용 역량 격차가 뚜렷한 상황에서 이는 또 다른 교육 불평등과 소외를 낳을 수 있다.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은 ‘작은 성공 모델’을 발굴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도록 지원하는 ‘중간 확산(Middle-out)’ 전략이다. 학교마다 기술에 관심이 많은 ‘퍼스트 펭귄’ 교사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AI를 활용한 수업 및 업무 개선 사례를 자유롭게 시도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영어교사가 AI 음성 인식 기능을 활용해 학생들의 발음 교정 활동을 진행하고, 그 긍정적인 결과를 동료교사들과 공유했다고 가정해 보자. 외부 강사의 이론적인 연수보다, 매일 얼굴을 보는 동료의 생생한 성공담은 훨씬 강력한 전파력을 가진다. 나아가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유용한 ‘AI 명령어(프롬프트)’를 학교의 지적 자산으로 축적하는 ‘프롬프트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교육 당국과 학교 관리자는 ‘전원 연수’라는 실적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교사 연구 모임을 활성화하고 이들의 성공 사례가 학교 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혁신은 구호가 아닌 문화로 스며들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짜 과제 _ ‘코딩’이 아닌 ‘비판적 문해력’을 가르치는 것
AI 교육 투자 강화라는 정책 기조 속에서, 학생들의 ‘디지털 문해력’은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디지털 문해력’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AI 시대의 문해력이란 코딩이나 특정 소프트웨어 활용 능력 같은 기술적 숙련도(technical skills)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AI가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비판적 사고력’이라는 고전적 역량에 가깝다.
학생들은 이제 AI에게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 알려줘’라고 질문하는 것을 넘어,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 일본과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각각 어떻게 다르게 서술하는지 비교하고, 그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당시의 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해 줘’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AI가 제시한 답변이 특정 관점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사실관계에 오류는 없는지를 스스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AI 시대의 디지털 문해력 교육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질문하는 능력’이다. 정답을 찾는 것을 넘어, 좋은 답을 이끌어내는 깊이 있는 질문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둘째, ‘분별하는 능력’이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맹신하지 않고, 그 정보의 출처와 맥락, 잠재적 편향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능력이다.
셋째, ‘책임지는 능력’이다. AI를 활용해 과제를 수행하되, 그 결과물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AI 활용 사실을 정직하게 밝히는 윤리적 태도이다.
이러한 역량은 별도의 ‘AI 정보’ 교과목 신설로 길러지지 않는다. 국어시간에는 AI가 생성한 글을 함께 비평하고, 역사시간에는 AI와 역사적 쟁점을 토론하며, 미술시간에는 AI가 그린 그림을 재해석하는 등 모든 교과수업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교실의 변화를 위한 제언 _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AI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조급함은 금물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교육이 그대로 따라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교육의 철학과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교육 당국은 현장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AI 디지털교과서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 도입에 앞서, 교사들이 AI와 ‘친해질’ 시간을 주고, 이들의 업무 부담을 실질적으로 덜어줄 수 있는 현실적인 지원책을 병행해야 한다. 디지털 문해력 교육 역시 기술 활용 교육이 아닌, 범교과적 비판적 사고 역량 함양으로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
학교 현장의 교사들은 AI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고, 나의 수업과 업무를 도와줄 ‘유능한 신입 조교’를 하나 얻었다는 생각으로 작은 시도를 시작해 볼 필요가 있다. 수업자료 준비나 평가문항 출제 등 가장 귀찮고 반복적인 일부터 AI에게 맡겨보자. 그렇게 확보된 시간과 에너지를 학생 한 명 한 명의 눈을 맞추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인간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AI 시대 교육의 진정한 본질일 것이다.
AI는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도구의 주인이 기술이 아닌 교사와 학생이 될 때, 우리 교실은 비로소 AGI 시대를 선도하는 진정한 혁신의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