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강단에 설 수 있었다

2026.09.10 16:04:02

네시간 반의 질주

살면서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당황이 아니라 지혜일 것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날이 있다. 그날의 긴박함이 내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교사 연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달력과 수첩에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 교육을 하루 앞둔 날이라고 생각하며 차 시간표까지 확인해 놓고 있던 아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선생님, 지금 오고 계시는 거죠?”

 

담당 장학사의 전화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만요.” 전화를 내려놓고 급히 공문을 확인했다. 세상에, 연수일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그날이었다. 달력에 날짜를 잘못 적어 놓은 것이다. 더구나 내 강의는 오후 시간 전체를 맡고 있어 다른 강사와 순서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노트북을 챙기고 머리를 감은 뒤 화장품 몇 가지를 가방에 쓸어 담았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간곡하게 세웠다. 다행히 기사님이 내 절박한 모습을 알아보셨는지 버스를 세워주셨다.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 달려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대전까지 KTX를 탔다. 당시 우리나라에 KTX가 운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라면 특별한 경험이었을 고속철도가 그날만큼은 나를 연수 장소까지 데려다 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기차 안에서도 쉴 수 없었다. 노트북을 열어 교육자료를 다시 점검하는 한편, 대전에서 익산까지 어떻게 이동할지 계속 궁리했다.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대전역에서 익산까지 가야 합니다. 제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택시를 기다리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택시회사에서는 친절하게 차량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대전역에 내리자 예약한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사정을 듣고 속도를 내면서 말했다.

 

“회사에서 전직원에게 공지를 했는데 익산이 고향인 사람을 찾았어요. 마침 제가 익산이 고향이라 이쪽 길을 잘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이동하는 동안 연수원 담당 장학사에게서 몇 차례 확인 전화가 왔다. 차를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연결해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KTX를 타고, 대전에서 또 택시를 탔다. 그렇게 숨 가쁘게 이어 달린 끝에 마침내 연수원에 도착했다. 강의 시작 30분 전이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네 시간 반 동안 마음 졸이며 달려온 길이었다. 나를 기다리던 장학사는 안도의 표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연수를 받으러 온 선생님들은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전혀 모르는 듯 점심시간의 평화로운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됐다. 이제 강의만 잘하면 된다.’

 

신기하게도 그날 강의는 어느 때보다 교사들과 교감이 잘 이루어졌다. 아침부터 이어진 긴장 때문이었을까. 무사히 강단에 섰다는 감사함 때문이었을까. 강의를 마쳤을 때 느낀 성취감도 유난히 컸다.

 

연수원에서는 저녁을 먹고 가라며 식당으로 안내해 주었다. 창가에 앉으니 붉은 석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날따라 석양은 유난히 곱고 음식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아침부터 꽉 조여 있던 마음이 그제야 스르르 풀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침 일찍 확인 전화를 해 준 담당 장학사, 출발하려던 버스를 세워 준 기사님, 대전역에 맞춰 택시를 보내 준 택시회사, 그리고 “익산이 고향이라 길을 잘 아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안심시켜 준 택시기사님. 나 혼자 잘해서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실수로 시작된 다급한 하루였지만, 그 실수를 만회하려는 노력에 여러 사람의 책임감과 친절이 하나씩 보태졌다. 그리고 그 작은 도움들이 연결되어 결국 예정된 시간에 교육이 이루어졌다.

 

살다 보면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해도 뜻밖의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실수를 자책하며 주저앉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하나씩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위기의 순간에는 당황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최선을 다해 뛰기 시작하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함께 손을 내밀어 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의 교육은, 하늘도 도왔다.

 

 

강미옥 신경주대 특임교수 moc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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