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 참 위대해

2007.03.04 09:05:00

퇴근하니 아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여보, 이거 어떻게 열어?"

아내가 켜놓은 컴퓨터 화면을 드려다 보니 거기엔 여러 가지 폐질환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에 `폐 섬유화증`이라는 병명을 가리키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내로부터 의자를 넘겨받아 폐 섬유화증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관련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았다. 여러 대학병원 호흡기 내과도 들러보고 이 곳 저 곳 포털 사이트를 옮겨가며 두 시간 가까이 확인한 것은 그 질환이 예후가 매우 좋지 않고 확실한 치료법이 없으며 반수 이상의 경우에 호흡곤란으로 5년 내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내에게 캐물었더니 폐 시티촬영 결과를 보고 의사의 소견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내는 저번에 모 종합병원에 건강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무료로 폐 검사를 해준다고 해서 폐 시티 촬영을 했다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몰려드는 불안과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잘 해주고 많은 사랑을 주어온 것도 아닌데 너무도 당황스러워 형언키 어려운 심정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 걱정이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이튿날 수능 시험 종사자로 근무하면서도 세 번이나 아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대답이 없다.

저녁 무렵 다시 전화를 했더니 시장에 가서 배추를 사가지고 이제 집에 왔단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씩씩하다. 평소에도 침착한 아내가 일부러 더 침착 하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해지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오니 아내가 밝게 웃는다. 나는 초조하고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다시 의사가 했다는 말에 대해 물어보고 그동안 몸에 이상증세는 없는지를 물어보았다. 설마 그 희귀하고 무섭다는 폐 섬유화증이겠느냐며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내 말에 아내는 힘없는 목소리로 "맞대” 한다.

맞다구? 그럼 의사는 확신을 가지고 폐 섬유화증이라고 했단 말인가. 폐 섬유화증 확진을 받은 환자들의 평균생존율이 5년이라는 그 무서운 질병이 확실하다는 말인가? 나는 아내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다른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자. 돈이야 아무리 들어가도 건강이 최고니까 빨리 다른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아내는 겉으로는 태연하고 침착한 척 했다. 먹구름 같은 것이 마음속으로 밀려왔다. 그동안 내가 겪은 시련이 얼마인데 이게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 아닌 지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의사가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했다니까 아직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는 게 옳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도, 나이 지긋한 의사라면 수많은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해왔을 텐데 설마 터무니없는 오진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에게 어떤 시련을 또 내려주시어 어느 길로 나를 이끌고 싶어 하시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조용히 하느님의 뜻에 따르리란 성급한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아내는 내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부평 가톨릭 성모자애병원에 가기로 예약했단다.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내게 하느님의 벌이 내리고 있는 건 아닌가. 아내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시인가? 침착하게 마음먹자고 다짐도 해본다. 아내는 아직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걸까. 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인가.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바로는 심각한 것에 틀림없다. 상당히 희귀한 것이기도 하다. 아내에게 그동안 얼마나 무심하게 살아왔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내를 무시하는 말도 수없이 해왔지 않았나. 내게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계시인가. 이제부터라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보여주시는 것인가.

나에게 어떤 시련이 아직도 더 남았다는 것인가. 별 생각이 다 들고 몰려드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는 성모자애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먼저병원에서 찍은 시티촬영 사진을 가지고 월요일에 다시 오라고 했단다. 나는 혼자 말처럼 속으로 뇌었다. 용기를 가져야한다. 현대의술을 믿어야한다. 아내는 다시 회복하여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최선을 다한 다음 하느님께 맏겨 드리자. 사람의 힘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를 수밖에…

초조한 날들이었다. 월요일 아내는 먼저 찍은 시티촬영 사진을 들고 가톨릭대학교 성모자애병원엘 갔다. 다시 한 번 정밀검진을 위해서. 낮 12시에 예약했단다. 출근하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다시 침대에 누워있었다. 피로하기 때문인가.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모두 그 폐질환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내는 별 증상을 못 느끼겠다며 오히려 느긋한데 나는 계속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해보며 초조해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 대학병원 호흡기 내과 홈페이지에 초기에 치료하면 완치에 가깝게 치료될 수 있다는 내용이 무슨 구원의 메시지처럼 뇌리에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두시가 채 못 되어 점식을 먹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조금 있다 전화하겠다는 답변이었다. 아마 막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나와 경황이 없는 듯 했다. 점심식사 중에 아내의 전화가 왔다. 아내의 전화임을 알았지만 못 받고 식사를 마치고 조용한 곳으로 가 전화를 했다. 아내의 첫 목소리에 생기가 실려 있다. 아내는 차분하게 진단과 면담결과를 얘기해 주었다. 종합병원 의사보다는 더 자세하게 심각하지 않은 어투로 설명해 주었단다. 조금 뭔가 보이기는 하는데 그러다가 또 없어지기도 한다고. 혹시 섬유화증 초기인지 여부는 더 검사를 해봐야 안다고. 당장 입원할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피검사를 하기 위해 채혈을 했는데 30여 가지 검사를 더 해야 한다고 했단다. 검사 비용만도 30만원인데 본인부담은 16만원이라고 했다. “아, 당신 참 위대해” 아내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별안간 드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며칠 동안 아내가 위태로운 것으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나는 얼마나 불안과 초조의 날을 보냈던가. 아내에 대한 나도 몰랐던 그런 속 깊은 정이 있었던가. 아내의 자리가 이렇게 큰 것인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겹겹이 밀려들던 절망감을 생각하면 10년 감수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초겨울에 김장을 하고 매일 반찬을 준비하고 아침밥을 챙겨주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아내의 손길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만약에 아내가 회복하지 못하는 질병이 확실하다면 어찌할 번했는가. 나의 상상력은 훨훨 날개를 달고 참으로 비참한 지경까지 날아갔던 것이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짜리 막내딸의 뒷바라지 문제, 스물다섯 쌍둥이 딸들의 결혼 문제,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엄마가 없다는 상황을 가정할 때 안겨들던 비통스러운 감정은 얼마나 마음을 짓눌렀던가.

“제발 당신 오래 살아야 돼. 오래 살아 저 아이들의 엄마로 저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의 외할머니로 역할을 다 해서 아이들에게 설움 남겨주지 말아야 돼.”

의사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줄은 몰랐다. 이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아직도 안심 할 수는 없다.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모의 건강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절실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의 건강은 또 어떻겠는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정말 소중하고 그 책임이 또 막중한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집에 와서 아내의 얘기를 들었다. 아내가 다소 신바람이 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나도 감동적으로 듣는다. 아내도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은 눈치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털어놓기도 한다.

고맙다. 결혼 후 아내가 고생을 한 것을 나는 잘 안다. 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나의 술버릇이 얼마나 아내를 힘들게 했을까. 전혀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을 때까지는 아직 안심할 수 없다. 건강을 잃어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는 말도 와 닿는다. 그 후 한 달쯤 지나 나는 다시 아내를 채근했다. 아직도 안심이 안 되니 다시 한 번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그래 인하대병원 호흡기내과에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았다. 한 달여 동안 여러 번 병원을 왕래하며 다시 정밀검사를 하고 의사와 면담을 했다.

결과는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호흡기엔 큰문제가 없고 식도염으로 식도가 많이 부어있다며 처방전을 발급해주었단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의사의 한 마디가 환자를 얼마나 불안에 빠트리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엉뚱한 일로 한바탕 소동을 벌이면서 나는 아내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 "여보, 당신 참 위대해!"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속에 맴돌았다.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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