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거기에 돌부리가 있을게 뭐람.’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와 만나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입구의 굽이진 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부딪혀 자동차의 앞 범퍼가 떨어져 나가 버렸다. 계획에 없는 차 수리비의 지출도 속이 쓰린 일이지만 그보다 더 속상한 것은 오랜 운전 경력을 이렇듯 무색하게 만드는 미숙한 나의 운전 실력이다.
그것도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스스로 거들먹거리며 과신할 때쯤이면 꼭 크고 작은 사고로 차를 상하게 하니, 아마 이번에도 부지불식간에 마음 속에 자만심이 들었었나보다.
사실 내가 미숙한 것은 운전뿐이 아니다. 근 20년에 접어드는 교직경력에도 나는 가끔씩 긁히고 떨어져 나가는 크고 작은 사고를 낼 때가 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운전과 마찬가지로 ‘난 참 괜찮은 교사야’라고 자만을 할 때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늘 반성문을 쓴다.
지난 주말,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 만에 열리는 동창회 겸 사은회에 참석했다.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일흔을 바라보며 백발노인이 된 선생님이 반성문을 쓰는 자세로 이 자리에 참석을 하였노라는 말씀을 하셨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일곱, 여덟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지금 여러분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였으니 내가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지나보니 모든 것이 다 후회가 되는 일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늘 반성문을 씁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자리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우리의 학창 시절 당시를 떠올리시며 우리는 기억도 못하는 몇 가지 일들을 고해성사처럼 하나씩 풀어 놓으셨다. 아이들과 며칠 전 있었던 일들도 가물가물한 내 입장에서 보면 오래 전의 일들을 가슴 속에 긴 시간동안 간직하시며 아쉬워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훌륭한 교사임에 틀림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 말씀대로 당시의 선생님보다 내가 더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반성문 쓸 일이 많은 같은 교직의 길을 걷고 있어서인지 어딘가 모르게 어렴풋한 공감이 생겼다.
나도 반성문을 써 보려고 한다.
지적 능력이 4~5세 정도인 초등학교 4학년 우리 반 석이.
“야~ 너, 소리 내지마.”, “야~ 너, 내 얘기 하지마.” “야~ 너, 네 자리 가.”
“석아~ 너는 왜 이렇게 친구들을 못 살게 괴롭히니?”
“아니에요. 쟤네가 먼저 저한테 뭐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보기에 똘이는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아니에요. 똘이가 저를 보고 가위로 찌른다고 협박했어요. 그래서 저도 복수할거예요.”
무고하게 끔찍한 협박을 했다고 신고를 받은 똘이는 황당함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석이는 잘못도 없는 친구들을 실내화까지 벗어들고는 때리겠다고 뛰어다니며 난리를 피운다. 감기에 걸려 한두 번 기침을 한 아이에게는 시끄럽게 소리를 낸다며 온갖 촉각을 세우고 아이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닦달을 시작한다.
우리 반 아이들이 다 알고 있는 그저 늘상 있는 일이지만 이쯤 되면 당하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보다 못한 나는 중재에 들어간다.
“영식이는 감기가 걸려서 기침을 하는 거야. 기침하는 친구는 얼마나 힘들겠니?”
“그럼 저도 감기에 걸렸으니까 기침해도 되지요?”
예상했던 결과지만 아이는 오늘도 자신만의 정당한 논리로 수업 시간 내내 거짓 기침으로 ‘켁켁’거리며 수업을 방해한다. 지저분한 외모는 물론이고, 목적을 알 수 없는 강박적인 공격성은 학급 아이들과 교사인 나를 지치게 만들기 일쑤다.
“석아~ 내 말 좀 들어, 네 말만 하지 말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아이의 팔을 거칠게 내 쪽으로 잡아끌며 큰 고함을 질러 버린다.
“싫어요. 으앙~ 선생님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래. 으앙.”
이쯤 되면 이젠 그 시간 수업도 물 건너 간 셈이 된다. 나머지 아이들만이라도 수업을 할 수 있게 원어민 선생님에게 학급을 맡기고는 아이를 데리고 건물 뒤편으로 나와 큰 나무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는다. 녀석은 여전히 고장 난 라디오처럼 자신만의 논리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는 녀석의 억울함 만큼이나 답답한 심정으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러다 웬일인지 조용해진 주변이 이상해 내려다보니 아이는 언제 그랬나 싶게 주위에 떨어진 낙엽을 하나둘 주워 모으며 몇 번이나 지옥을 맛 본 담임선생님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질문을 해 댄다.
“이 나뭇잎은 왜 빨개요? 이 나뭇잎은 왜 노랗지요? 왜 나뭇잎의 색깔이 다 달라요?”
‘아이고, 풋.’ 허망함에 헛웃음이 나오는 순간이다.
나는 오늘도 반성문을 쓴다.
“철수야, 너는 다 좋은데, 선생님 말씀마다 말꼬리를 달아서 말하거나 친구들의 말에 비아냥거리는 태도는 좋지 않아.”
“민석아, 너는 다 좋은데,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돌아다니거나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수업을 방해하는 태도가 좋지 않아.”
“순이야, 너는 다 좋은데,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거 같아. 기본적인 수학 계산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식이란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고 지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명감으로 나는 참 많은 잔소리를 학생들에게 한다. 그리고는 잔소리에 공식처럼 늘 “너는 다 좋은데” 식의 긍정 언어로 시작을 하는 것에 스스로 능숙한 교사라고 만족한다. 그런데 오늘 점심 급식 시간에 같이 식사를 하던 우리 반의 한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은 다 좋으신데, 우리에게 칭찬은 ‘다 좋다’라고만 말씀하시고 우리가 고쳐야 할 점은 참 구체적으로 이것저것 말씀을 하세요. 칭찬도 이것이 좋고, 저것이 좋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오늘 녀석에게 한 방 먹었다. 나는 오늘도 반성문을 쓴다.
일요일 아침, ‘풀꽃도 꽃이다’라는 소설의 앞부분을 잠깐 읽었다. 이제는 노작가가 된 조정래 씨가 교육계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고 하니 무슨 내용일지 궁금한 마음에 지난 금요일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아직 다 읽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항상 시대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작가인지라 교육계가 문제는 문제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은 일찍 일어난 탓도 있겠지만 치열한 일주일을 보낸 후의 주말이라 조금 여유를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잠자리에 있는 가족들이 깨지 않은 틈을 타서 산책도 할 겸 읽던 책을 잠시 덮고, 동네에 있는 호수 공원으로 나왔다. 어제 밤에 온 비로 낙엽들이 공원 주위에 이리 저리 떨어져 있었다. 새삼 떨어진 낙엽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 가을이구나.” 간만에 느낀 가을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 여기 저기 떨어져 있는 낙엽을 향해 스마트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다가 얼마 전 중학생인 딸 아이 방을 청소하다가 아이의 책상 위에 소복이 쌓여 있던 마른 낙엽더미가 문뜩 떠올랐다. 엄마처럼 낙엽에서 가을의 아름다움을 느낀 행동이라 생각을 하니 딸아이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라 툴툴거리기만 한 딸이 가끔은 괘씸하고 미운 생각도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픈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알게 된 것 같아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선생님, 나뭇잎이 왜 빨개요? 왜 이건 노랗죠?”하며 눈망울을 반짝이던 석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도 아마 그동안 내가 답답해 한 만큼 나를 답답하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내일도 어쩌면 녀석들에게 답답함으로 괴성에 가까운 고함을 지를지 모른다. 그리고 또 아이들에게 크게 한 방 먹고 휘청거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 이 순간만은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라는 결심을 해 본다. 비록 그것이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반성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