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의 고장, 평창에서 만날 사람

2018.02.22 13:14:49



해피700. 평창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표어다. 해발고도 700미터를 의미하는 ‘700’에 행복을 붙였다. 평창에 오면 행복해진다는 뜻일 것이다. 해발 700미터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고도라고 하는데 서울이 100미터 정도니 평창의 자연환경이 어떤 곳인지 짐작하게 한다. 올림픽이 아니어도 복잡한 삶을 벗어나려는 요즘 사람들에게 평창은 쉬어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높은 지형 때문에 눈이 늦게까지 남아있어서 불편했던 특성이 이제는 동계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불편한 700’을 ‘행복한 700’으로 바꿔 부르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삶이 바뀌면서 자연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나 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삶에 대한 접근방법이 달라지면서 변화가 온 것은 아닐까.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묻고 답할 여유를 가진다면 실마리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역사 속 평창에는 그런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평창에 담긴 이야기1-보천과 효명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상원사 창건과도 관련 있는 이야기인데 정신대왕(신문왕)의 두 아들이 오대산에 들어가 불법을 닦았다는 내용이다. 신라의 승려 자장은 이미 한참 전에 문수보살을 찾아 이곳에 수행하며 오대산이란 이름을 지었다. 오대산 중대는 자장이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셔놓아 적멸보궁이라 부른다. 두 왕자는 오대산 북대 남쪽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암자를 짓고 매일 아침 오대산 중대에 머무는 1만 문수보살을 위해 차를 공양하며 지냈다.(지금도 월정사와 상원사는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 도량이다) 
 
하지만 신라 왕실에 변란이 생겨 왕이 죽자 사람들은 보천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오대산으로 왔다. 이에 보천이 울며 사양하자 동생인 효명이 왕위에 올랐다. 언뜻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형제의 우정이다. 
 
그런데 당시 신라 상황과 연결해보면 다른 내막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문왕이 피의 숙청을 통해 유력 진골세력을 무너뜨렸다. 그 과정에서 장인인 김흠돌과 왕비 역시 숙청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새로 왕비를 맞아들였다. 신문왕이 죽고 새 왕비의 아들인 태자가 왕이 됐다.(효소왕) 하지만 효소왕이 후사 없이 죽자 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성덕왕이 된다. 
 
이런 역사적 내막을 <삼국유사> 기록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신문왕의 태자가 효소왕이 됐을 때는 지위가 애매한 왕자가 있었다. 전 왕비의 아들(보천), 그리고 새 왕비의 아들이지만 효소왕의 동생인 아들(효명)이다. 이 둘은 정치의 비정함을 본 터라 불법 수행을 위해 오대산을 찾았다. 하지만 효소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위를 이을 사람을 찾아 오대산에 온 것이다. 형인 보천 대신 효명이 간 것을 양보의 미덕으로 기록했지만 사실, 그 자격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삼국유사> 기록처럼 보천은 계속 수행을 하고 효명은 경주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던 것은 아닐까. 
 
가설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평창, 오대산이 신랄한 정치의 피로를 양보의 미덕으로 바꾸는 공간이 됐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형제의 우정이란 것도 여기서 쌓였을 것 같다. 성덕왕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대산에 ‘진여원’을 창건해 불법을 닦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곳이 지금의 상원사다.





평창에 담긴 이야기2-문수보살과 세조

조선시대 왕 가운데 평가의 어려움을 겪는 인물이 바로 세조다. 조카와 여러 신하(충신으로 부른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좋은 얘기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재위 기간 동안 왕으로서 충실했고 조선 건국 이래 최고의 목표였던 <경국대전>의 초석을 닦아 성종 때 반포가 가능하도록 했다. 그런 세조에 대해 평창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번 이야기의 배경도 상원사. 재위 말년에 몸에 부스럼이 생겨 어려움을 겪던 세조는 당시 유명한 승려였던 신미의 조언으로 상원사를 중창한다. 이때 남긴 기록인 <상원사중창권선문>은 손으로 쓴 가장 오래된 한글 기록이기도 하다. 상원사를 여러 번 찾은 세조는 어느 해 절 입구 계곡에서 몸을 씻다가 신비한 일을 겪는다. 왕이 몸을 씻는 공간이니 사방을 막으로 가렸을 것이다. 이때 어린 아이 하나가 장막 안 세조 옆으로 왔다. 

여느 때라면 불호령이 떨어져야겠지만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던 터라 아이에게 등을 닦도록 했고 왕의 벗은 몸을 봤다고 얘기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줬다. 그러자 아이도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를 봤다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사라졌다. 자장율사가 그렇게 보려 해도 만나지 못한 문수보살이 세조의 몸까지 닦아준 것이다. 그때 본 동자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든 것이 상원사 문수보살상이다.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상원사에 도착한 세조. 예불을 드리기 위해 절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세조의 옷을 잡아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절 안을 살피도록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 있었다. 세조를 도왔다는 고양이는 지금도 법당 앞에 돌조각으로 서 있다.
 
두 이야기를 보면 고양이 같은 동물도, 문수보살 같은 신성한 존재도 세조에게 다가섰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세조가 훌륭한 존재여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세조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 인물일까. 아마 독자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평창이 너그럽게 그런 세조를 받아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평창에 담긴 이야기3-메밀꽃과 이효석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 장면이 있다. 아이들을 태운 배가 메밀꽃이 넘실거리는 곳을 바다삼아 지나가던 모습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메밀꽃 넘실거리는 풍경이 평창을 상징함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은 당연하게도 소설가 이효석이다. 교과서에도 실린 그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묘사된 달빛 아래 메밀밭은 소설이 아니라 시에 나와야 적당하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런 묘사를 위해서는 메밀밭을 잘 알아야 한다. 실제 이효석은 어린 시절 지금의 봉평에서 100여리 떨어진 평창 공립보통학교(평창초)에 다니며 하숙을 하다가 집에 돌아올 때는 소설 속 주인공들(허생원과 동이)이 걸었던 길로 돌아왔다. 이효석은 다른 소설에서도 농촌의 모습을 잘 묘사한 소설가로 인정받는다. 
 
이효석은 14살 때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한 이후 서울과 평양, 그리고 함경도 경성과 만주 일대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또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집에 피아노와 프랑스 배우 사진을 놓고 크리스마스와 커피를 즐기던 모더니스트였다. 그런 이효석이 평양에서, 그것도 한참 지난 고향을 묘사한 것이 이렇게 실감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이효석에게 평창이라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눈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던 곳이 아닐까. 

이처럼 누군가 고향을 기억하는 방법을 살펴보는 건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끌어낸다는 것, 그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늘 앞만 보고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일생의 큰 그림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해 줄 것 같다. 평창에서 그런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여행이야기 박광일 대표, 심미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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