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개막작인 ‘불리(BULLY)’는 학교폭력 문제에서 ‘공감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철저히 피해자 학생·학부모의 입장에서 학교폭력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관람을 마치고 나온 교원들도 “가슴이 무겁고 먹먹하다”고 소감을 전한 이유다. ‘변화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처럼 학생․학부모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학교폭력문제 해결에 얼마나 중요한 열쇠인지는 우리나라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대전지역에서 학교폭력 발생 건수가 많았던 태평중(교장 김정옥)은 지난 4월부터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청소년 영화제작 모임’을 만들면서 학교폭력이 크게 줄었다. 이 학교는 학생선도위원회·학교폭력징계 처분 조치를 받았던 학생, 각 반에서 폭력 언행 가능성이 높은 학생 등 학교폭력 가능성이 높은 ‘위험군 학생’들로 모임의 80%를 구성하고, 이들 스스로 학교폭력 예방 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3월 7건, 4월 5건이었던 학교폭력 발생 건수가 모임 구성 후인 5, 6월에는 각각 1건씩으로 줄어든 것이다.
허원준 지도교사는 “위험군 학생들이 영화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잘못된 행동과 모습에 대해 반성했던 것이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영화 촬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 참을성, 약속․소속감 등 위험군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인성에 대해서도 배우게 됐다. 나중에는 학생들이 “우리는 학교를 대표해 영화를 만드는 팀이기 때문에 절대 징계 받는 행동을 하지 말자”고 서로를 설득할 정도가 됐다.
지난해 자살한 학생의 담임교사가 학교폭력 방조혐의로 불구속 입건돼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서울 S중의 경우 학생·학부모․교원을 대상으로 올해 상반기에만 30차례 이상 대대적인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해 학생·학부모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S중 교장은 “학교폭력 사안을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할 일이 없을 정도로 지난해와 비교해 학생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방교육도 교육이지만 친구의 자살과 검찰조사를 직접 받거나 지켜보면서 자신의 일처럼 모두 공감하게 된 것이 변화의 핵심이었다”면서 “아직도 학교폭력은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다른 학교 교원들을 보면 먼저 나서서 알려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범죄학대회’에 참석한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도 ‘공감’과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원장은 “우리나라는 구성원 전체가 범죄의 위험과 파장에 대해 공감하는 힘이 약한 사회”라며 “학교폭력 문제로 자살사건이 벌어진 뒤 흐지부지 대책이 되풀이되는 것은 해당 범죄의 심각성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는 지난해 학교폭력으로 한 학생이 자살하자 모든 중고교에서 ‘추모의 날’ 행사를 열어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며 “의식적으로 사회와 학교에서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