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가정교육, 함께 사는 지혜를 일깨워야

2007.10.15 13:54:00


가정은 우리들이 태어나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최초의 학교이다. 가정은 한 아이가 출생하면서부터 존엄한 인격체로 대우받으면서 부모와 가족의 사랑과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곳이다.

그러나,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가정의 교육적 기능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버렸다. 특히 핵가족제도가 보편화되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가정의 역할과 기능은 크게 변화하였다. 특히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품을 벗어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길러지고 있다. 할머니나 외할머니 등 가족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심지어는 남이나 탁아시설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다. 옛날 우리들의 성장기와 비교해 보면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대가족제도 속에서 부모의 의한 양육은 물론이거니와 조부모, 삼촌, 고모, 사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다양한 가치와 삶의 방식을 배워온 것이다. 가족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엄한 질책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와 넘치는 사랑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둘의 자녀를 위해서 부모들은 인생의 전부를 걸고 철저히 희생하고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의 속을 썩이는 아이들은 여전히 있고, 오히려 잦은 비행과 일탈행위로 자신은 물론이고 부모까지 힘들게 하는 경우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고슴도치 자기 새끼 예뻐하듯 자녀를 귀여워하고 위해주다가 어느 날 저절로 자라난 듯 고집 세우는 아이를 보면서 절망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잘못 형성된 습관이나 태도는 평생 바꾸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가르쳐서 바른 인간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말일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다. 거짓말을 하거나 친구들과 싸움을 했을 때, 경망스럽게 놀거나 어른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을 때마다 회초리를 맞으면서 아버지의 따끔한 가르침을 받곤 했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 기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 음식점, 공공장소에 가보면 우리나라 가정교육의 현주소를 체감할 수 있다. 음식점에 온 아이들이 지나칠 정도로 장난을 치고 떠들어대도 그의 젊은 부모는 오히려 활동적인(?) 아이를 대견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원칙을 가르치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녀의 자유로움과 사기를 생각하고 있다. 나만 즐겁고 기쁘면 되지 남의 불편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에 하나 누가 아이를 나무라기라도 하면 그 부모는 바로 ‘당신은 자식 안 키워요?’라고 반격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에서 바른 성품을 가진 아이를 길러내는 가정교육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식사 때마다 밥상머리에서는 부모님의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부모가 베푸는 밥상머리 교육은 식사예절에서부터 일상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당시에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을 길러내는 장점도 있지만, 남을 이 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우리 인간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런데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고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과연 그가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설사 가정교육이 있다하더라도 그 내용이 단순화되어 있고 또한 너무나 편협하다는 점도 문제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받았던 가정교육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바람직한 삶의 태도나 습관’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부모들은 ‘공부나 특기에서 남들보다 잘하기’를 강조할 뿐 ‘원만한 공동체적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들 세대는 일의 수고로움을 체득하면서 성장했다. 아들로 태어나 소를 키우는 일, 밭에 씨를 뿌리는 일, 수확을 거드는 일 등을 하면서 ‘노동’의 의미를 배우면서 자랐다. 일을 통하여 가족과 연대의식을 공유하였고, 가족을 위한 부모의 희생과 노고를 이해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들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왕자나 공주처럼 그들을 받들고 있을 뿐, 생생한 현장 체험 교육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자기 방의 이부자리를 개는 일에서부터 청소하는 일 등은 이미 부모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의 청소는 자기가 생활했던 공간을 청결하게 하는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근 극성 학부모들은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누구라도 귀하고 곱게 키운 자식이 험한 일을 하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이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있는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을 이해하고 돕는, 일의 수고로움도 당연히 가르쳐야 할 덕목이다. 맹목적인 자녀 사랑이 아이들의 체험을 확대시키지 못하고 있고,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교육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세상이 태어나서 세 살이 되기까지 인성의 50% 정도가 결정되고, 8세까지 80% 정도가 정착된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내 자녀를 올바로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바른 길인가에 대한 냉철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육의 근본 문제를 사회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학교 교육의 문제’로 귀착시키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이는 ‘가정교육의 약화’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가정교육이 약화된 상황에서 유독 학교교육에만 지나치게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가정교육이 튼실하지 못하면 아무리 교육환경과 여건이 현대화되어도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모래밭에 견고한 건축물을 지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가정에서부터 바르고 참된 것을 가르치고,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부모와 타인을 존경하게 하고, 법과 규칙을 지키도록 가르친다면 우리 아이들은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자신의 역할과 소임을 다할 것이다. 부모가 바쁘다고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 맡겨 버리고 돈을 내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가정은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 만나는 최초의 학교이다. 가정에서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배운 삶의 진실은 학교에서 배운 그 어떤 것보다도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선각자, 지도자의 가정교육이 이를 웅변처럼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의 야박한 민심에 편승하여 자녀에게 ‘공부 잘 하라’고 주문처럼 되풀이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일깨워주는 가정교육으로 되살아났으면 한다.
송일섭 (수필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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