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다. 그리워했던 푸른 하늘이 반갑다. 가끔 보이는 흰 구름이 하늘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여기에다 가을바람이 분다. 이런 아침이면 우울했던 나날을 하루 만에 날려버릴 것 같다.
성인은 지혜로웠고 판단력이 탁월했다. ‘당나라 내준신,來俊臣은 주흥,周興의 범죄 유무를 판명하기 어렵자 그를 조사하기에 앞서 시치미를 뚝 떼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완강한 죄인을 자백케 하는 방법을 물었다. 주흥은 커다란 항아리를 석탄불로 달구고 죄인을 그 속에 넣으면 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준신은 커다란 항아리를 불로 달구고, <청컨대 그대는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시오>라고 주흥을 재촉하자, 부들부들 떨던 주흥은 바로 자기 죄를 인정했다'고 한다.
성인 같은 선생님도 지혜롭고 판단력이 탁월하다. 선생님이 크게 존경을 받는 이유가 지혜롭기 때문이고, 판단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성인은 곤경에 빠져 있는 이를, 있는 힘을 다해 은혜에 보답할 줄 안다. ‘전국사군 중 한 명이었던 맹상군의 식객 풍관은 처음에 전사에서 지냈는데, 대우를 개선해달라며 <내 긴 칼이여 돌아갈까, 밥상에 물고기도 없구나>라고 노래했다. 맹상군이 행사로 옮겨주자, 또 <내 긴 칼이여 돌아갈까, 외출하려는데 수레가 없구나>라고 노래했기 때문에 대사로 옮겨 주었다. 그 뒤 풍관은 맹상군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성인 같은 선생님도 그렇다. 은혜를 안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은혜를 갚는다. 은혜를 입고도 은혜를 모르는 이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삶은 남다르다.
성인은 무엇이든 거리를 두고 참모습을 객관적으로 본다. ‘소동파의 칠언절구인 제서림벽의 셋째 구절에는 ’여산의 참모습‘이란 구절이 나온다. <가로로 보면 산줄기 세로로 보면 봉우리/원근고저 같은 게 하나도 없구나> 여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함은/이 산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여산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성인 같은 선생님은 무엇을 바라볼 때마다 주관적이지 않다. 거리를 둔다. 객관적이다. 그러면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참모습을 파악하려면 자신이 그 속에 들어있으면 안 된다.
성인은 날마다 자신을 되돌아본다. ‘북송의 장서가 송수는 ’교서는 먼지를 터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한 곳을 털어내면, 다른 곳에 먼지가 인다. 그러니 책 한 권마다 삼교 사교를 해도, 오자와 탈자는 여전하다>라고 이어진다. 교서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과 같아서, 이쪽을 털어내면 저쪽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한 책마다 세 번 네 번 교정을 해도, 빠지거나 잘못된 곳이 여전히 있다. 교서에 끝이 없듯이 사람의 허물을 씻어낸다 해도 끝이 없다. 그래서 날마다, 시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뉘우치고 고쳐나간다.
성인 같은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본다. 그러면서 자신을 고쳐나간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면 또 허물이 나오고 계속해서 나온다. 허물을 교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평생을 그렇게 산다. 그래서 선생님은 존경을 받을 만한다.
성인은 몸과 마음이 모두 유연하고 생기가 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고, 문지도리가 좀 슬지 않는 것은 움직이기 때문이다>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게 된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듯, 늘 자신의 기능을 활발하게 만들어, 몸과 마음이 모두 유연하고 생기 있게 한다.’
성인 같은 선생님도 움직임이 활발하다. 멈추지 않는다.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멈추지 않는다. 늘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바삐 움직인다. 교재연구만 해도 가득인데 학생들 입시지도를 하랴, 생활지도를 하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래도 기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