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 성지를 찾아서

2017.07.11 13:24:15

 폭우가 그치고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7월 8일 오후 절두산 순교성지를 찾았다. 합정역에서 제2한강교를 건너가는 입구 왼쪽에 있는 이곳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양화나루 잠두봉이라 불리며, 중죄를 지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형을 집행하였는데 잡범들은 밖에서 처리했고 종교나 국사범들은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성호를 그리며 순교했는데 머리가 이곳에서 잘려 숨졌다고 하여 이곳을 '절두산'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이 지역을 성지로 조성하였고,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던 1967년,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척화비 모습은 물론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등이 있어 조선의 사회와 문화,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이용은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로 월요일은 휴관이다.(예약문의 02-3142-4504)


이곳에는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1-1846) 상이 주목을 끈다. 단지 교과서를 통하여 최초의 신부가 누구인가를 아는 정도의 정답을 찾기 보다는 그의 족적을 찾아봄으로 한 젊은이가 신앙을 위하여 어떻게 살았는가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상해에서 1845년 우리나라 최초로 신부 서품을 받고 1846년 다시 입국하여 비밀 상륙 지점을 모색하다가 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 이후 6차례에 걸친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인생이 한 번 나고 한 번 죽음은 피치 못할 바이니 오늘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오히려 나의 원하는 바이다. 오늘 물어도, 내일 물어도 오직 같을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들에게 오히려 어깨를 들먹이며 가련하다는 듯이 웃었다고 한다.


마지막 형자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가 목을 어떻게 하면  당신네들이 편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14살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한창 놀 25살 나이에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그토록 의연히 최후를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신부이기 이전에 한 젊은 인생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또, 19세기 우리 나라가 서세동점의 시기에 외세 침략을 받으면서도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켰으며,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며 성장 발전하고, 앞으로 길이 보전하기 위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성지 탐방이 되기를 기원하여 본다.





김광섭 교육칼럼니스트 ggs19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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