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목은 양보다 질, ‘교과 쇼핑몰’ 역효과

2021.04.05 10:30:00

 

고교학점제는 외고·국제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을 추진하는 고교체제 개편과 더불어 현 정부의 핵심적인 교육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따라 현 정부 출범 이듬해인 2018년부터 고교학점제 연구·선도학교가 지정·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2020년부터는 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들에서 고교학점제를 우선 적용하고 있다. 교육부는 그동안 누적된 경험과 효과를 바탕으로 2025년부터 고교학점제를 일반고에 전면 적용하며, 이를 위해 새로운 국가교육과정을 2022년에 고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 외국의 학교들을 방문하고 수업을 관찰하다 보면 초·중학교들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언어가 다르고, 교실 구조가 다르고, 교과서가 다르지만, 우리 학교들에 비해 구조적인 차이나 질적인 차이가 두드러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고등학교들을 방문하다 보면 우리 학교들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때가 많다. 학생들을 대하는 교사나 성인의 태도, 학생들의 학교생활, 교육과정이나 수업이 진행되는 방식, 학습자 평가 등에서 우리와 상당히 다른 차이가 관찰되기 때문이다.

 

후기 중등학교로서 고등학교는 학제 위치상 독특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중등’에 무게 중심을 두면 중학교와 가까워지지만, ‘후기’에 무게 중심을 두면 대학과의 유사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구조적 차이도 이러한 이중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들이 중학교의 모습에 좀 더 가깝다면, 서구의 고등학교들은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학의 모습에 좀 더 가깝게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제도적 차이 이상으로 문화적 차이가 숨어 있다. 우리는 고등학생들도 여전히 큰 아이(big boy)로 보는 반면, 서구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준성인(young adult)으로 보는 시각이 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육 체질개선 계기

이렇게 보면 고등학교 교육을 바꾸려는 최근의 노력들은 중학교에 가깝던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학사운영을 대학교에 가깝도록 전환하려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시도들로는 선택과목 확대, 교과교실제 도입, 성취평가제 확대, 탐구중심 과목 확대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구조와 체질이 상당 부분 개선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학교는 낙후된 시설과 환경, 단순한 교수·학습방법, 학생들과 유리된 교육과정, 경쟁 중심의 학교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고교학점제는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고 21세기에 걸맞게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체질을 바꾸려는 가장 최근의 노력이자 종합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가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근본적인 개선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있어 왔던 여러 시도들 가운데 하나에 그칠 것인지는 현장 교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교학점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체제에 큰 폭의 손질이 필요한 만큼, 현장 교원들 사이에 우려와 걱정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큰 것으로 보인다.

 

고교학점제는 다양한 형태로 구현이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고, 해당 과목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함으로써 학점을 취득하고, 취득 학점이 누적되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받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간단한 설명이지만, 고교학점제가 실제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하고, 또한 시행 이후에는 학교 생태계의 여러 측면에 상당한 파급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다과목 지도교사 처우개선 필요

고교학점제가 가져올 변화 가운데 교사와 관련된 것들로는 우선 선택과목 확대에 따른 다과목 지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지금처럼 단일 교과목을 여러 반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에서 벗어나 두 개 이상의 과목을 한 학기에 개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담당교과 안에서 보통과목을 추가로 개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따른 부담 증가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교양과목과 같이 담당교과영역을 벗어난 과목을 추가로 개설하는 경우에는 부전공 연수지원 등의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교과목 개발비와 같은 수당을 추가하는 등, 교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편 기존의 교원 구조 안에서 학교교육과정을 다양화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교학점제의 도입은 강사 채용 확대와 순회교사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금보다는 공동교육과정이나 교육과정 거점학교, 학교 밖 학습경험 등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나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해 현장의 교원들은 상당한 우려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보다 수업 준비에 대한 부담이 커질 뿐만 아니라, 미이수를 부여하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고, 미이수 학생을 누가, 어떤 식으로 추가 지도할 것인지 등이 아직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개설한 교과목을 선택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적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난감한 문제이다. 이외에 강사 채용이나 순회교사의 확대는 교원들의 업무부담 증가로 이어지고, 학교 밖 교육과정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교육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 비판들은 일부 과도한 것도 있고 일부 타당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선택한 학생들이 없어서 전임교원이 개설한 교과목이 폐강되는 경우는 실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학생들의 사전 조사를 거쳐 교과목이 개설될 뿐만 아니라, 선택과목의 규모를 조절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택과목 숫자를 늘리는 것에 고교학점제 관련 논의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선택과목 규모를 늘리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과목 하나하나의 질을 얼마나 개선하느냐가 보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장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과목의 내용·방법·평가기준 등을 재점검하고, 학생들에게 보다 충실한 학습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고민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교원정책이 바로 교사들이 교육과정 개발과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다. 사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우리나라와 서구의 고등학교가 갖고 있는 구조적 차이의 또 다른 일부이기도 하다. 외국의 교사들에 비해 우리나라 교사들은 수업과 무관한 업무에 너무 많은 감정적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교사들이 고교학점제에 걸맞은 전문성과 자율성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행정업무부담을 경감하는 조치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업무부담 증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부전공이나 복수전공 등을 통해 교사들의 수업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선택과목을 늘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학생들의 관심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무분별한 선택과목 확대는 자칫 정체불명의 교과목 양산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흔히 학점제 기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고등학교 교과목이 무질서한 쇼핑몰 같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뷔페의 예를 들면 고교학점제의 관건은 음식 가지 수를 복잡하게 늘리는 것보다 음식 하나하나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강사와 순회교사, 공동교육과정에 대한 의존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학교 교육과정 혹은 개별 교과목의 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청 혹은 교육지원청 차원에서 양질의 강사 풀을 확보하고, 순회교사들에게 적절한 지원과 근무환경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교육과정 설계 전문가 길러야

또 하나 중요한 교원정책은 학교별로 학생 규모에 적절한 숫자의 교육과정 설계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단위학교에 개설된 교과목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와 식견을 바탕으로, 개별 학생의 진로 적성과 관심에 적절한 교과목 이수 경로를 설계하고 추천하는 역할을 담당할 전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육과정 설계 전문가는 학교 안에서 교과목 소믈리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기존에도 진로지도나 상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학점제 하에서는 학생들이 적절한 이수 경로를 만들어 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진다. 그래야지만 학생들의 과목 선택이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가 담임교사의 역할을 축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한 교육과정 설계 전문가의 양성과 배치를 통해 이에 따른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교학점제로의 길은 긴 여정이고, 우리는 지금 그 출발선에 서 있다. 고교학점제는 교육과정 생태계의 전반적인 재검토를 요청하기 때문에, 결국 현장교원들의 집단적 지혜와 참여를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제도이다. 따라서 현장교원들을 위한 후속 조치와 지원 대책에 고교학점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홍원표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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