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일본 오사카엑스포는 세계 경제의 기운이 마침내 아시아로 넘어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본은 이 대회 포함 총 4회를 열었고, 한국은 2회(인정대회), 중국이 1회 등 최근 반세기 동안 아시아 국가들이 대거 개최 했다. 문화적 다양성의 자양분을 흡수한 현대 엑스포는 더는 서방의 전유물이 아닌 공생의 문명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서방 전유물 탈피 ‘새 흐름’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엑스포는 각각 아시아 최초의 기록이다. 이는 일본이 패전국에서 선진국으로 부활했음을 세계만방에 알린 드라마틱한 무대가 됐다. 반세기 넘어 일본은 다시 한번 그 성공 공식을 들고나왔다. 2020년 도쿄올림픽과 2025년 개최 예정인 오사카·간사이엑스포가 그것. 일본에선 1970년 오사카엑스포 당시 청소년층을 ‘반바쿠(万博) 세대’라 한다. 반바쿠는 엑스포의 일본식 번역어 ‘만국박람회’의 줄임말. 올림픽과 엑스포를 통해 청운의 꿈을 품었던 세대가 이제 장노년층이 됐다. 그 새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침체를 겪었다. 21세기 들어 다시 시도하는 올림픽-엑스포 연계는 침체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재도약을 외치는 함성이다.
일본은 1970년 엑스포를 최고의 이벤트로 치르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오사카 시내와 50㎞ 떨어진 박람회장 중간에 수이타 위성도시를 건설해 도로·철도·통신·전산망을 깔았다. 이 인프라 조성 사업에 투입된 자금은 23억 달러.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38억2800만 달러였던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다. 오사카엑스포는 ‘인류의 진보와 조화’라는 주제 아래 이상적인 미래도시 양식의 박람회장을 조성하고, 중앙에 70m 높이의 ‘태양의 탑’을 세웠다.
오사카엑스포는 올림픽과 개발 효과를 주고받으며 기념비적 성과를 거뒀다. 일본을 세계 경제 슈퍼파워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엑스포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 관람객 수 6422만 명은 40년 뒤 2010년 상하이엑스포에 와서야 깨진 역대급 기록이다.
일본이 뚫은 길을 한국과 중국이 뒤따랐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3년 대전엑스포는 나란히 아시아 두 번째였다. 특히 대전엑스포를 통해 한국은 산업 강국으로 우뚝 섰음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2012년 여수엑스포는 한국이 앞서가는 첨단 ICT 기술을 동원해 해양 활용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각종 신기록 기념비적 성과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통해 세계를 향해 포효했다. 거대 시장과 막강한 생산력을 보유한 ‘G2(주요 2개국)’ 슈퍼파워를 보여준 셈이다. 랜드마크인 중국관은 전통목조건축 두공기법으로 지은 6만8000㎡ 규모의 중국 홍색 건축물로 중국이 세계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집약했다.
상하이엑스포는 여러 면에서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황푸강 둔치 523만㎡ 부지에 펼쳐진 박람회장 규모와 190개국 참가, 7308만 명에 이른 방문자 수는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루 최다 입장객 수도 사상 최초로 100만 명을 돌파했다. 북한과 대만이 엑스포에 처음 참가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