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칼럼] 모두가 시인인 나라

2026.03.05 10:00:00

시(詩)의 언어
최근 최민자의 수필집 <사이에 대하여>를 읽다가 ‘모래 울음’이라는 글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결이 하도 고와 시처럼 줄을 바꾸어 보았다.

 

모여 앉아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말을 섞지도 얼싸안지도 않고 
돌아앉아 버석거려본 것들은 안다.
부딪쳐봤자 상처나 주고받을 뿐이라는 것을.

정 붙이면 안 된다고
다시 또 나뉘고 헤어져야 한다고
가슴팍 쪼개가며 배워버린 이별.

…(중략)…

모래가 운다.
채송화 한 송이 피워 올리지 못하는 
저 쓸쓸한 불임(不姙)의 이름으로
싸륵, 싸륵 버석거리며 운다.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하며, 그녀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poetic prose)”을 써왔다고 평했다. 한강은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으로 등단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상징과 운율이 느껴지는 문장을 구사했다. 최민자의 수필 또한 상당 부분이 시어로 가득 차 있다. 노벨상 수상자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라면 최민자의 수필은 ‘시 그 자체’이다. 우리말은 어휘와 표현 방법 자체가 비유·상징·함축·서정적 묘사로 이뤄진 시어(詩語)적 특성이 강한 언어인 것 같다. 

 

시의 DNA를 품은 언어와 국가
우리는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나라이고, 대형 서점에는 시집 코너가 눈에 띄게 자리 잡고 있다. 작고한 개그맨 전유성 씨가 우리 대학 초청 강연에서 자신은 시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며 예비 교사들에게 늘 시를 읽으라고 강력하게 추천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는 단지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창의성의 뿌리이다.


시가 삶 속에 녹아 있는 나라로는 러시아·이란·칠레·아이슬란드를 들 수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시는 ‘영혼의 양식’이다. 푸시킨·레르몬토프·아흐마토바 등 국민 시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동네 작은 서점조차 시집 코너를 정성스럽게 꾸민다. 올랜도 파이지스(Figes, 2002)는 <나타샤 댄스: 러시아 문화사>에서 러시아인들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시를 암송하며 정신적 위안을 얻는 문화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척박한 역사와 추운 겨울을 공유하는 우리에게도 시는 시대를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이란은 ‘시가 공기처럼 존재하는 나라’이다. 페르시아 시는 이란인의 일상 언어와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Schimmel, 1992). 많은 가정이 하페즈(Hafez)나 루미(Rumi)의 시집을 경전처럼 비치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명절에 시집을 펼쳐 점을 치는 ‘팔-에 하페즈’ 문화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상징적이다(UNESCO, 2023).


칠레는 ‘시인의 나라(País de poeta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베르나르도 수베르카소(Bernardo Subercaseaux)의 <칠레 사상과 문화의 역사(2003)>는 칠레의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시와 문학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파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두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을 배출했다. 산티아고의 서점들은 이들의 시집을 포함한 커다란 시 코너를 가지고 있다. 


인구 대비 출판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아이슬란드는 자신들을 ‘시인과 독자의 나라’로 정의하고 있다(Guðjónsson, 2022). 겨울철 시집을 선물하는 ‘욜라보카플로드(Jolabokaflod)’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BBC, 2013). 2011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ik)는 비영어권 국가 최초로 유네스코 문학 창의 도시로 지정되었다. 선정 사유 중 하나로 풍부한 시적 전통과 높은 창작 활동이 언급되었다.

 

기술의 시대, ‘시성비’와 시의 새로운 가능성
위에서 인용한 문헌 기록들과 달리 어쩌면 그 나라에서조차 인터넷과 AI 영향으로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이 크게 줄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 선조들은 모이면 시를 읊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마다 시화전이 유행이었고,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았다. 1990년대에도 회식 자리에서 노래 대신 시를 읊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제 시낭송회는 드문 풍경이 되었고, 서정적 가곡과 함께 시도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


시를 쓰고 읽는 추동력은 역설적이게도 ‘혹독한 겨울’ 같은 힘든 물리적 환경과 절대 고독이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와 같은 고통스러운 심리적 환경인 것 같다. 외적 자극을 무한대로 제공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깊은 영혼의 세계를 돌아볼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겨울철 실내복보다 시를 찾는 마음, 시가 주는 치유력과 감동이 더 먼저 얇아지고 있는 것 같다.


우려와 달리 비유·상징·함축이 특징인 시적 표현은 디지털 네이티브인 Z세대에게 오히려 가장 매력적인 소통법이 될 수 있다. Z세대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극도로 중시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연구(김인애, 2024)에 따르면, 이들은 1.5배속 시청을 기본값으로 여기며 지루한 부분을 참지 못한다. 정보 과잉 시대에 필요한 핵심만을 빠르게 골라내려는 이들의 생존 전략은 본질적으로 ‘함축’과 ‘상징’을 지향한다. 


그들의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표현 방식이 한자성어와 시어(詩語)가 아닐까 싶다. 기성세대에게는 낯선 신조어의 범람 역시 최소한의 음절에 최대한의 감정을 담으려는 ‘시성비’적 발로다. K-컬처 열풍의 배경에도 직설을 넘어 시적으로 승화된 감각적인 언어와 영상미가 깔려 있다. 시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짧고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이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고밀도의 콘텐츠인 것이다.


기성세대가 Z세대의 감각에 들어맞는 새로운 시적 표현을 개발하고 널리 사용한다면 세대 간의 벽이 낮아질 것이다. 사용하는 어휘는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시적 표현이 우리 일상을 채운다면 우리의 삶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우리 언어의 품격도 더 높아질 것이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시적 어휘로 소통할 때, 한류는 일시적인 태풍이 아니라 상처받은 세상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훈풍이 될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싸륵싸륵 우는 모래알 같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시라는 ‘채송화 한 송이를 피워 올리는’ 일, 그것이 오늘날 어른들이 걸어가야 할 ‘시적인 길’이 아닐까 싶다.

박남기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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