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나리의 계절

2017.06.02 14:21:27

김민철의 야생화 이야기

이금이의 장편동화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미르, 소희, 바우 등 세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느끼는 아픔을 극복해가는 이야기다. 미르는 아빠, 소희는 부모, 바우는 엄마가 없지만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며 커가는 얘기를 그렸다. 1999년 나온 책이라 필자가 클 때는 없었던 책인데, 아이들 방에서 우연히 보고 빠져들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소희는 바우에게 누나 역할을 해주는 등 셋 중 제일 조숙한 아이다. ‘부모가 없고 예쁘고 비싼 옷을 입지 못해도’ 언제나 당당하다. 바우는 이런 점 때문에 소희가 하늘말나리 같다고 생각한다. 바우는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이 꽃 이름이 뭔 줄 아세요? 하늘말나리예요. 진홍빛 하늘말나리는 꽃뿐만 아니라 수레바퀴처럼 빙 둘러 난 잎도 참 예뻐요. 다른 나리꽃 종류들은 꽃은 화려하지만 땅을 보고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향해서 피어요. 마치 무언가 간절히 소원을 비는 것 같아요.”

소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도시의 작은아버지 집으로 가야 했다. 바우는 소희에게 하늘말나리를 그린 그림을 주면서 ‘소희를 닮은 꽃.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이라고 쓴다. 그러자 소희가 “너희들도 하늘말나리야”라고 말하고 떠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이 소설은 꽃들이 많이 등장해 서정적이면서도 아이들의 심리를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려내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청소년용 동화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달밭 마을을 떠난 소희의 이야기를 다룬 후속작 ‘소희의 방’도 나와 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소희에 대해 “제가 예전에 시골에 살 때 만나고 보았던, 상처와 결핍 때문에 일찍 성숙해진 아이들의 결정체”라고 말했다.

특징을 이름에 담은 나리

나리는 이글거리는 태양과 맞서듯 여름에 피는 꽃이다. 빛이 잘 들지 않는 계곡에서는 피지 않고 능선 중에서도 빛이 잘 드는 곳에 많다. 야생화 동호회인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이트에는 회원들이 찍은 사진을 올리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를 살피면 그즈음 회원들이 관심을 갖는 꽃은 무엇인지, 많이 피는 야생화는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최근 10년간 데이터를 집계한 결과, 6월에 가장 많이 올라온 꽃이 털중나리였다. 7월은 솔나리가 1등, 2등이 참나리, 3등은 하늘말나리였다. 하나 건너 5등은 땅나리였다. 6~7월은 단연 나리 종류가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하늘말나리는 백합과의 여러 나리 중 하나다. 그냥 ‘나리’라는 식물은 없고 참나리, 땅나리 등 접두사가 하나씩 붙어 있다. 참나무가 어느 한 나무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고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 여러 참나무 종류들을 모두 아울러 일컫는 이름인 것과 같다. 이들 나리 이름 규칙을 알면 나리를 만났을 때 이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꽃이 피는 방향에 따라 접두사가 다르다. 하늘나리는 꽃이 하늘을 향해 피고, 중나리는 대략 옆을 향해, 땅나리는 땅을 향해 핀다. 여기에다 ‘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줄기 아래쪽에 여러 장의 잎이 돌려나는 것(돌려나기·윤생)을 뜻한다.

그러니까 하늘말나리는 꽃이 하늘을 향해 피고 잎이 돌려나는 나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꽃은 노란색을 띤 붉은색을 띠고, 자주색 반점이 있다. 우리나라 전역과 중국 산둥 성에서 자란다. 요즘엔 서울 남산 같은 곳 화단에도 많이 심어놓아서 전보다 흔히 볼 수 있다.


다른 나리들은 꽃잎에 반점이 많은 ‘깨순이’들인데 땅나리는 피부과에 다녀왔는지 얼굴이 깨끗하다. 섬말나리는 울릉도 특산이라 ‘섬’자가 붙었는데, 돌려나기 잎이 1~3층인 것이 특징이다. 잎이 솔잎처럼 가는 솔나리도 있다. 대체로 나리꽃은 노란색에서 붉은색 사이인데, 솔나리꽃은 분홍색이다. 중나리는 줄기에 생기는 까만 구슬 모양의 주아가 없는 것 말고는 참나리와 거의 똑같아 ‘주아 없는 참나리’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크고 화려한 참나리 

뭐니뭐니해도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나리는 참나리다. 여름이 무르익는 7~8월이면 많은 꽃송이가 달린다. 참나리는 나리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참’이라는 접두사가 붙었다. 참나리는 잎 밑부분마다 주아가 주렁주렁 줄기에 붙어 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까맣고 둥근 이 주아는 땅에 떨어지면 뿌리가 내리고 잎이 돋는 씨 역할을 한다. 무성생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성하게 자손을 퍼뜨려 화단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 꽃에 검은빛이 도는 자주색 반점이 많아 호랑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참나리의 영문명은 ‘tiger lily’다.


참나리를 비롯한 나리들은 꽃이 피는 시기가 조금씩 달라 6월부터 초가을까지 아름다운 나리꽃을 차례로 볼 수 있다. 그중 털중나리가 가장 먼저 피면서 무리 중 선봉대 역할을 한다. 필자는 해마다 6월 초 남한산성에 오른다. 그즈음 서문(西門)을 좀 지나면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 털중나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털중나리는 전국 산에 비교적 흔한 꽃으로, 줄기와 잎에 미세한 털이 많다고 붙은 이름이다. 꽃잎 6장이 뒤로 확 말리고 꽃잎 안쪽에 듬성듬성 자주색 반점이 있는 모습이 아주 예쁘다. 강렬한 색감과 자신감 넘치는 자태가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털중나리가 보이면 봄이 끝나고 여름이 왔다는 의미다.

털중나리 다음으로는 하늘나리가 피고, 그다음 말나리·하늘말나리·중나리, 이어서 땅나리·참나리가 피고, 솔나리가 가장 늦은 8월까지 핀다. 이처럼 나리마다 피는 시기와 개성이 달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리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백합과 나리는 같은 말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합도 나리 비슷하게 생겼다. 백합과 나리는 무엇이 다를까. 원래는 같은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백합(百合)은 한자어이고, 나리는 우리말이라는 점밖에 없다. 흔히 백합이라는 이름 때문에 ‘백합은 하얀 꽃’이라고 생각하는데, 백합의 ‘백’은 ‘흰 백(白)’이 아니고 ‘일백 백(百)’이다. 백합은 구근(알뿌리)식물인데, 구근의 비늘줄기가 백여 개 모여 있다는 의미로 백합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향기가 진한 개량종 원예종만을 따로 백합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요즘에는 울긋불긋하고 모양도 다양한 외래종 백합이 셀 수 없이 들어오고 있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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