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종 뺨치는 과일 꽃의 자태

2019.05.03 10:00:00

사과나무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오르는가.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과일 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과일 꽃이 피는 4~5월엔 온갖 꽃들이 만발할 때여서 과일 꽃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일 꽃 자태도 웬만한 원예종 꽃이나 야생화 못지않다. 특히 사과꽃, 배꽃, 복숭아꽃, 앵두꽃, 모과꽃 등은 꽃도 어여쁜 데다 얘깃거리도 참 많은 꽃이다.

 

 

풋사랑의 싱그러움을 담은 사과꽃 향기

사과나무꽃은 하얀 5장의 꽃잎에 황금색 꽃술이 달린다. 꽃봉오리는 처음에는 분홍색을 띠다 활짝 피면서 흰색으로 변하는데, 분홍색이 아직 남아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 그즈음 사과꽃은 수줍어 살짝 붉어진 아가씨의 볼을 연상시킨다. 사과꽃은 향기가 참 좋다. 이 향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잘 익은 사과가 가득 담긴 박스를 처음 개봉할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맑고 싱그러운 향기다.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에선 사과꽃 향기가 조숙한 소녀의 풋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새의 선물>은 남도의 지방 소읍에 사는 조숙한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소설이다. 삼촌의 서울 친구인 허석이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가족들은 밤 영화를 본 다음 과수원 길로 산책을 간다. 풋사랑의 시작이다.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진정 나는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과수원이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진해진다. 사과꽃 냄새다. 삼촌과 허석이 앞서서 걷고 그 뒤를 나와 이모가 따라간다. 어두운 숲길에는 정적이 깃들어 있고 사과꽃 향기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하늘에는 별도 있다. (…중략…)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허석, 그와 밤 숲길과 사과꽃 향기뿐이다. 사과꽃 향기에 쌓여 그와 내가 봄 숲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수원의 사과나무꽃은 이 소설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허석이 그리우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풋사과가 매달린 과수원 길을 한없이 걷는다. 풋사랑이라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요즘은 서울 종로 길거리나 공원 같은 곳에도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놓아 과수원까지 가지 않아도 맑은 사과꽃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은은한 품격이 느껴지는 순백의 배꽃

공지영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는 ‘배꽃 같은 여자’ 소희가 나온다. 이 소설은 신부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修士) 요한이 세속 여성과 사랑에 빠져 방황하다가 한 단계 성숙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젊은 수사를 사랑에 빠지게 한 주인공은 아빠스(Abbas·대수도원 원장)의 조카, 소희였다. 요한 수사가 소희를 처음 만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불암산, 요셉 수도원, 흰 배꽃…. 그래, 그녀의 이름을 여기에서 처음 발음해보기로 한다. 김소희, 소화 데레사.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헐렁한 완두콩빛 스웨터에 무릎까지 오는 나풀거리는 흰 스커트를 입었고 납작하고 세련된 연둣빛 데크슈즈를 신고 있었다. 내가 멀리서 그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실루엣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다른 수사와 배꽃 사이를 걷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함께 걷던 수사의 무슨 말인가에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내가 처음 본 것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검은 수도복을 입었지만 29살 젊은이인 요한 수사에게 ‘흰 배꽃 사이로 걸어가던 그녀의 무릎 아래서 흔들리던 흰 스커트’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요한 수사는 아빠스의 지시에 따라 소희의 논문 연구를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며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요한 수사는 신부 서품을 앞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더구나 소희에게는 어릴 때 약속한 헌신적인 약혼자가 있었다. 결국 소희는 떠나고 요한은 이별의 고통을 겪는다.

 

배꽃은 흰색의 꽃잎 5장에 검은 점을 단 꽃술이 조화를 이룬 것이 품격을 느끼게 하는 꽃이다. 은은한 향기도 좋다. 특히 5월 산들바람에 하얀 꽃잎들이 흩날리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이 소설을 읽고 배꽃이 필 무렵 불암산 기슭에 있는 요셉 수도원(경기도 남양주)에 가보았다. 나풀거리는 흰 스커트를 입고, 흰 배꽃 사이를 걷는 아가씨는 볼 수 없었지만, 드넓은 과수원에서 마침 절정에 이른 하얀 배꽃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과일 꽃 중의 여왕, 매혹적인 모과꽃

복숭아꽃(복사꽃)은 꽃색이 연분홍색인데다 꽃 안쪽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것이 요염한 느낌을 주는 꽃이다. 조지훈의 시 <승무>에서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가 괜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복사꽃은 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이중섭 그림에서 자주 나오는 꽃이다. 제목이 ‘벚꽃 위의 새’인 그림(은은한 푸른빛을 배경으로 하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도 사실은 벚꽃이 아니라 복사꽃을 그린 것이다. 이중섭은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쾌유를 비는 의미에서 천도복숭아를 그려 주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서 복사꽃은 무릉도원 즉, 낙원을 상징하는 꽃이다.

 

앵두나무(추천명은 앵도나무)꽃은 동글동글 귀여운 꽃잎에 꽃술 아랫부분이 붉은빛이 돌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경복궁에 가면 유난히 앵두나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경복궁에 앵두나무가 많은 데는 사연이 있다. ‘문종실록’에는 문종이 왕세자 시절 앵두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이 앵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효심이 깊은 문종이 손수 앵두나무를 심고 직접 물을 주면서 정성껏 길렀다는 것이다. 세종은 “여러 곳에서 진상하는 앵두도 많지만 세자가 따다 준 앵두라 더욱 맛이 있다”며 세자의 효심을 칭찬했다.

 

‘모과’는 무엇보다 울퉁불퉁 못생긴 것이 특징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까지 있다. 그러나 꽃에 이르면 상황이 180도 다르다. 봄에 진한 분홍색으로 피는 모과꽃이 뜻밖에도 아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향기까지 아주 좋다. 과일 꽃 중에서 여왕을 뽑는다면 아마 모과꽃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다. 내가 심사해도 모과꽃을 고를 것 같다. 모과나무는 꽃도 예쁘지만, 수피도 아름답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매끄러운 줄기에 있는 얼룩얼룩한 무늬가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처럼 과일나무들은 과실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예쁜 꽃들도 선사하는 고마운 나무들이다. 올봄이 가기 전에, 과일나무가 있으면 꼭 한번 꽃과 눈을 마주쳐 보기 바란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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