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고 발그레한 동자승의 넋일까

2019.08.06 10:30:00

 

몇년전 여름휴가 때 아내와 지리산을 종주한 적이 있다. 이틀만에 험한 산길 30여㎞를 걷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동자꽃, 원추리, 노루오줌, 꿩의다리, 산수국 등 지리산 야생화를 원없이 보니 힘든 줄을 몰랐다.

 

노고단 고개에 올라 주황색 동자꽃과 노란 원추리 군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세석산장 주변도 동자꽃, 원추리, 둥근이질풀, 터리풀 등 귀한 야생화들이 널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빙글빙글 돌 것 같은 물레나물도 지천에 있었다. 수목원보다 꽃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듯 했다. 동자꽃은 한여름인 6~8월에 주황색 꽃이 피는데 제때 지리산을 찾은 것이다. 지리산 동자꽃은 특히 햇볕을 충분히 받고 영양상태도 좋아서인지 선명한 주황색이 짙을대로 짙었다.

 

야생의 동자꽃을 처음 본 것은 딸들을 데리고 강원도 인제 곰배령에 갔을 때였다. 진동리에서 강선마을을 거쳐 곰배령에 이르는 길은 5.5㎞로,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 큰딸에게는 힘든 코스였을 것이다. 작은딸은 중간에 울어 엄마 등에 업혀서 돌아갔다. 큰딸도 마지막 가파른 길을 오를 때는 거의 울듯 했다. 그러나 마침내 곰배령에 올라 너른 평원에 동자꽃, 둥근이질풀 군락이 환상적으로 펼쳐진 것을 보곤 신나서 뛰어다녔다. 이제 다 큰 딸에게 “동자꽃 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묻자 “곰배령”이라고 했다.

 

독특한 색깔, 고운 자태 동자꽃 매력

동자꽃은 눈에 잘 띄는 독특한 색깔과 고운 자태에다 이름까지 특이해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꽃이다. 아이들도 다른 꽃 이름은 금방 잊어버려도 이 꽃 이름만큼은 단번에 기억했다.

 

이 꽃이 동자꽃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암자를 떠난 스님을 기다리다 죽은 동자(童子)에 얽힌 설화 때문이다. 설악산 마등령 자락에 백담사 부속 암자로 관음암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인조때 다섯살짜리 동자승이 한겨울 암자에서 홀로 스님을 기다리다 성불했다고 해서 암자 이름을 관음암에서 오세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은 이 설화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동생 길손이와 누나인 감이는 부모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다. 길손이는 눈먼 누나의 눈 역할을 하고 누나 감이는 길손이의 엄마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남매는 한 스님에 이끌려 절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길손이는 장난이 심해 조용한 절을 뒤집어 놓는다. 스님은 장난이 심한 길손이가 젊은 스님들의 미움을 받는 것을 보고 길손이를 데리고 암자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길손이는 스님을 따라 깊은 산속에 있는 관음암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런 길손이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 한번이라도 엄마를 가져 보는 것, ‘엄마’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길손이는 암자 골방 그림에 있는 관세음보살을 엄마라고 부른다.

 

어느날 스님이 겨울을 보낼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길손이를 홀로 두고 장에 다녀오는데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사력을 다해 돌아가려고 했지만 쌓인 눈 때문에 그만 눈 위에 쓰러지고 만다. 스님이 감이를 데리고 다시 관음암으로 향한 것은 길손이를 혼자 두고 떠나온지 한달 하고 스물날째였다. 길손이는 관세음보살 그림 아래에서 엄마의 품안에 아주 편안히 누운 것처럼 숨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정채봉 선생이 쓴 동화 ‘오세암’의 이야기다. 이 동화는 2003년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 다음은 다시 설화인데, 스님이 동자승을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어주자 이듬해 여름 그 자리에 동자승의 얼굴처럼 동그랗고 발그레한 주황색 꽃이 한송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이 꽃을 동자의 넋이 피어난 것으로 여겨 동자꽃이라 불렀다. 동자꽃은 스님을 기다리던 동자승처럼 지금도 항상 산밑을 바라보며 꽃을 피운다고 한다. 동자꽃은 가만히 보면 꼭 귀여운 동자가 웃는 모습과 닮았다.

 

제비동자꽃엔 감탄이 절로…

‘오세암’은 1984년 발표된 이후 아름다운 문장과 깊은 울림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정채봉의 동화는 특히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줄 한줄에 간절함이 가득하고,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는 평을 듣고 있다.

 

정채봉(1946~2001) 선생은 전남 순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와 여동생을 낳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아버지 또한 일본으로 이주해 거의 소식을 끊다시피해서 정채봉 남매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런 사실은 작가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지만, 고아 남매를 다룬 ‘오세암’을 쓰는데 자양분으로 작용한 것 같다. 선생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풀지 못하니 자꾸 글로 나타나는 것 같다”며 “의식적으로 어머니에 대해 안쓰려고 하는데도 쓰다보면 글에 어머니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선생이 샘터에 연재한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인 동화'라는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동자꽃은 카네이션·패랭이꽃과 함께 석죽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참나리·원추리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튀는 색깔에 화사한 것이 상당히 인상적인 꽃이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와 울릉도 같은 섬지방을 제외하고는 어느 산에서나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분포해 있다.

 

꽃은 줄기 끝과 잎 겨드랑이에서 나와 한 송이씩 피어난다. 꽃받침은 긴 곤봉 모양으로 꽃잎을 감싸고, 꽃잎은 5개다. 꽃잎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좀 복잡하다. 꽃잎은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 영락없는 하트 모양이다. 꽃잎 양쪽에 1개씩 좁은 조각이 있는 것이 이 꽃의 특징이다. 또 꽃의 안쪽에 10개의 작은 비늘조각이 있다. 줄기에서 마주 나는 잎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 꽃은 원래 높은 산에서 자랐으나 꽃이 예뻐서 지금은 도심 화단에도 많이 심고 있다. 다만 서울 양재동 꽃시장에서 동자꽃을 사다 키운 적이 있는데, 아파트 베란다라 그런지 제 색깔이 나지 않고 꽃도 오래 가지 않았다.

 

동자꽃과 비슷한 종류로는 짙은 홍색의 꽃잎이 제비의 꼬리처럼 깊이 갈라진 제비동자꽃이 있다. 제비동자꽃은 꽃이 워낙 독특해서 한번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강원도 인제 대암산 용늪에 갔을 때 화려한 제비동자꽃을 원없이 본 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잎과 줄기에 흰색 털이 많이 나 있는 털동자꽃도 있다. 털동자꽃은 우리나라 중부 이북의 산지, 즉 추운 곳에서 자라 털이 많은 모양이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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