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등, 붉은 입술 개성 만점 할미꽃

2020.04.06 11:00:00

할미꽃은 이름부터 참 정다운 꽃이다. 4월이면 거의 우리나라 전역에서 볕이 잘 드는 야산의 자락, 특히 묘지 근처에서 볼 수 있다. 키는 한 뼘쯤 자라지만 아주 굵고 깊은 뿌리를 가진 경우가 많다. 고개 숙인 꽃송이를 보면, 꽃잎은 검붉은색이고 그 안에 샛노란 수술들이 박혀 있다.

 

 

일제강점기 사학자이자 언론인 문일평은 『화하만필(花下漫筆·‘꽃밭 속의 생각’으로 재출간)』에서 “첫봄 잔디밭에 풀이 파릇파릇 새 생명의 환희를 속삭일 때, 나면서부터 등이 굽은, 할미꽃은 벌써 그 입술에 붉은 웃음이 터지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섯 장으로 갈라진 잎도 개성 만점이다. 줄기와 잎은 물론 꽃잎 뒤쪽까지 가득 돋아나는 솜털들은 할미꽃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할미꽃이란 이름은 꽃이 지고 열매가 익으면 그 열매에 흰털이 가득 달려 마치 하얗게 센 노인 머리와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할미꽃의 한자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다. 열매에 붙은 긴 깃털 같은 것은 씨앗을 가볍게 해 바람을 타고 멀리 퍼지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박완서 작가는 할미꽃을 좋아한 모양이다. 노년을 보낸 경기도 구리 아치울마을 노란 집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우리 마당에 있는 나무와 꽃이 백 가지가 넘는다”고 자랑하면서 꽃 목록에 할미꽃을 빠뜨리지 않았다. ‘제비꽃이나 할미꽃, 구절초처럼 심은 바 없이 절로 번식하는 들꽃까지도 계산에 넣긴 했지만’ 하는 식이다. 작가가 제목으로 할미꽃을 쓴 소설이 있는데,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1977년 발표한 단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990년대 이후 ‘페미니즘 소설’로 다시 주목을 받아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가 20년쯤 시대를 앞서 소설을 쓴 셈이다.

 

이 소설에는 두 노파 이야기가 나온다. 6·25전쟁 중 여자들만 사는 마을에 미군이 찾아오는 위기가 닥치자, 양색시를 자초한 노파, 전쟁터에서 숫총각은 죽는다는 기묘한 풍문에 불안해하는 군인과 관계를 맺어준 노파다.

 

첫 번째 이야기는 남자들은 국군에 지원하거나 인민군으로 끌려갔고, 남쪽으로 피난 가거나 북쪽으로 끌려가 여자만 남은 마을이 배경이다. 마을에 진주한 미군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집집을 기웃대자 여자들은 무서움을 견딜 수 없어 마을에서 제일 큰 집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마을에서 제일 웃어른뻘인 노파가 나선다. 젊은 여자들에게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몸을 더럽히지 않고 식량을 얻어 돌아온다.

 

두 번째 이야기는 한 젊은 병사가 나이 든 여인과 잠자리를 갖는 내용이다.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하고 전투에 나가면 전사자가 된다는 풍문이 돌아 흉흉하다. 적의 총알은 숫총각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김 일병은 인근 마을에서 비교적 정정한 노파를 만나 이 얘기를 했고, 노파의 제안으로 숫총각 딱지를 뗐다. 그는 ‘뭔가 당한 것 같은 억울함’과 노파의 욕망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런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노파의 행위야말로 무의식적인 휴머니즘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차들은 뻔질나게 다니는데 포장은 안 된 황톳길이 있다. 그런 길가에서 허구한 날 먼지를 뒤집어써서 마치 도시의 삼류 왜식 집 베란다에 장식한 퇴색한 비닐 모조품 꼴이 돼 버린 길섶에서 문득 찢어지게 선명한 빛깔로 갓 피어난 들꽃을 본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알 것이다. 기가 차고 민망한 대로 차마 그게 꽃이 아니라곤 못 할 난감하고 지겨운 심정을. 그런 심정이 되어 그들 노파를 여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성적인 의미의 여자라도 좋고 (중략) 아기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얼굴과 호칭을 익히는 엄마로서의 여자라도 좋다. 아무튼, 그 노파들은 여자였다고, 죽는 날까지 여자임을 못 면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소설 안에서는 할미꽃을 거론하지 않고 제목에 할미꽃을 넣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더라도 이 소설이 두 노파를 할미꽃에 비유한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박완서의 다른 소설 「오동의 숨은 소리여」에서도 소설 속에서는 오동나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제목에 ‘오동(梧桐)’을 넣은 것과 마찬가지 방식이다.

 

이 소설은 1977년 발표한 것이지만 20년 후인 1997년 여성 작가들이 발표한 페미니즘 소설 11편을 묶은 소설집에 표제작으로 실렸다. 오정희의 「옛 우물」,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 김형경의 「민둥산에서의 하룻밤」등이 함께 들어 있다. 이 책을 펴낸 경희대 하응백 교수는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에 대해 “전쟁에서 여성 특유의 모성애가 어떻게 공동체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물은 소설”이라며 “페미니즘은 남녀 간 대결이나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니라 모성의 평화적 확대”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할미꽃은 한창 꽃다운 시절엔 허리를 숙이지만, 열매가 익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꽃대를 위로 곧게 세우는 꽃이다. 조금이라도 위에서 씨앗을 날려야 멀리 날아가기 때문이다. 전국 산지에서 자라는 백합과 식물 처녀치마도 이와 비슷하다. 꽃이 필 때는 꽃대가 10cm 정도로 작지만 수정한 다음에는 꽃대가 쑥쑥 자라 50cm 정도까지 훌쩍 크는 특이한 꽃이다.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 뒷산에서 60cm 이상 꽃대를 높인 처녀치마를 본 적도 있다. 그래야 꽃씨를 조금이라도 멀리 퍼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할미꽃이 요즘 부활하는 꽃이라면 동강할미꽃은 유명한 아이돌급 야생화다. 검붉은색 일색인 할미꽃에 비해 홍자색 등 다양하고 화려한 색깔로 피어 동강 절벽을 장식하는 꽃이다. 필자도 초봄에 동강할미꽃 보러 몇 번 갔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동강에 여러 번 갔다.

 

동강할미꽃은 또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피기 때문에 할미꽃은 구부정하게 피는 꽃이라는 기존 인식을 무색게 하는 꽃이다. 형태학적으로는 할미꽃과 비교해 암술과 수술 수가 적은 점이 다르다.

 

이 동강할미꽃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이 생태사진가 김정명 씨다. 김 씨는 1997년 동강에서 야생화 탐사를 하다 바위 절벽에서 ‘하늘을 향해 피는 할미꽃’을 발견했다. 김 씨는 다음해 자신의 「한국의 야생화」캘린더에 이 꽃 사진을 실었고, 2년 후인 2000년 동강할미꽃은 세계에서 유일한 식물로 학계의 인증을 받았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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