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 꽃빛의 홍조

2020.06.05 10:30:00

윤후명 <둔황의 사랑> 자귀나무꽃

6~7월 전국 산이나 공원에서 마치 공작새가 연분홍색 날개를 펼친 듯 화사한 꽃이 핀 나무를 볼 수 있다. 길이 3㎝ 정도의 붉은 명주실을 부채처럼 펼쳐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자귀나무다. 명주실처럼 가늘게 생긴 것은 자귀나무 수꽃의 수술이다. 이 수술이 25개 정도 모여 부채처럼 퍼져 있고, 각각의 끝에는 작은 구슬만 한 것이 보일 듯 말 듯 달려 있다.

 

 

윤후명의 중편소설 <둔황의 사랑>엔 ‘자귀나무 꽃빛의 홍조’라는 매혹적인 표현이 나온다. 필자가 찾은 자귀나무꽃에 대한 표현 중 단연 최고다.

 

소설 주인공인 ‘나’는 연극 연출가인 친구로부터 ‘둔황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신라 시대 혜초의 책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둔황 석굴을 배경으로, 혜초의 사랑과 구도의 길을 그리는 희곡을 써보라는 권유였다. 둔황은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4,000km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있는 불교 유적지다.

 

소설 전개 과정에서 서역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 고대 악기 공후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나’는 주간지에 근무할 때 공후를 켰다는 노인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세종문화회관 벽면에 새겨진 비천상 천녀가 가슴에 안고 있는 악기가 바로 공후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사망한 후였고, 대신 그 손녀를 만나 할아버지한테 배웠다는 고조선의 노래 ‘공후인’을 듣는다. 자귀나무 꽃빛 홍조는 이 대목에서 나오고 있다.

 

소녀는 단정히 앞으로 손을 모으고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입을 벌렸다. 무슨 노래일까,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중략) 볼에 발그랗게 홍조를 띠고 있었는데, 첫소리가 나올 때, 그 긴장과 흥분을 말해 주듯 목청이 바르르 떨렸다. (중략) 작은 손수건을 미리 뒤로 동여맨 동그란 얼굴은 연두빛 블라우스 위에 마치 얹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뺨에는 자귀나무 꽃빛의 담홍색 홍조가 물들어 있었고, 코에는 땀방울이 송송 배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입을 벌릴 때마다 가지런한 잇바디 사이로 나타나는 빨간 혀끝. (중략) 그리고 자귀나무 꽃빛의 홍조가 두 볼을 물들이고 떨리는 그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귀나무꽃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그 홍조가 얼마나 예쁘면서도 자극적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진분홍색에서 아래로 갈수록 밝은 미색으로 변해가는 꽃잎의 그러데이션(Gradation·한 색에서 다른 색으로 점진적으로 변해 가는 것)이 일품이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명주실 실타래를 풀어낸 듯하다고 영어 이름이 비단나무(Silk Tree)다.

 

 

자귀나무는 어린 시절 고향의 야산이나 마을 입구 또는 집 마당에서 흔히 보아서 친근감을 주는 나무다. 꽃이 피면 엷게 퍼지는 향기도 맑고 싱그럽다. 꽃송이를 코끝에 가져가 보면 부드러운 감촉도 좋다. 서울 시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청계천에도 몇 그루 심어놓았고, 경복궁 향원지 근처에도 꽃 색깔이 붉은색에 가까운 화려한 자귀나무들을 볼 수 있다.

 

자귀나무는 박범신 장편소설 <소금>에도 나오고 있다. 주인공이 여자친구 시우의 임신 사실을 아는 대목에 “달이 떴는지, 자귀나무 그림자가 창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밤이 되면 대칭을 이룬 잎사귀들이 오므라들어 포개지기 때문에 부부 금실을 상징하는 합환수(合歡樹)로 불리는 나무였다. 우희의 마지막 모습이 자귀나무에 겹쳐 떠올랐다”는 글이 있다. 작가가 자귀나무를 등장시킨 것은 주인공과 시우가 나중에 결합할 것이라는 복선을 깔아놓은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자귀나무는 밤이 오면 양쪽으로 마주 난 잎을 서로 맞댄다. 그래서 합환수(合歡樹),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 등 별칭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혼집 마당에 심어 부부 금실이 좋기를 기원했다. 소가 잎을 잘 먹는다고 소밥나무, 소쌀나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자귀나무 잎이 붙은 현상을 수면운동이라고 부른다. 자귀나무가 수면운동을 하는 것은 낮에는 최대한 잎 면적을 넓혔다가, 밤에는 수분과 에너지 발산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전략이다. 가을에는 길이가 한 뼘쯤인 콩깍지 열매가 달린다. 이 열매가 바람이 불면 여자들 수다처럼 시끄럽다는 뜻으로, 자귀나무를 여설수(女舌樹)라고도 부른다.

 

꽃 색깔이 진분홍색이 아니라 노란색에 가까운 왕자귀나무도 있다. 왕자귀나무는 자귀나무보다 귀해서 어쩌다 보면 한번이라도 더 눈에 담고자 자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남부지방과 서해안에서 볼 수 있다.

 

자귀나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잠자는 데 귀신 같다’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 자귀(나무 깎아 다듬는 연장의 하나)의 손잡이를 만드는 나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동혁 풀꽃나무 칼럼니스트는 “잎의 수면운동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되는 별칭 중 하나인 좌귀목(佐歸木)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며 “좌귀목이 ‘좌귀나무’가 되었다가 지금의 자귀나무로 변한 것”이라고 했다.

 

 

윤후명(1946년생)은 시인으로 출발해 소설을 함께 썼고,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3년 100여 가지의 꽃·나무에 얽힌 사연을 엮은 산문집 <꽃-윤후명의 식물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책 ‘작가의 말’에서 그는 “꽃에 바친 시간은 참으로 길다. ‘태어나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인데, 그럴 수 없으니 ‘철들면서부터’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또 “꽃의 빛깔, 향기, 모습에 황홀하다”며 “아울러 생명의 신비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학창 시절 그는 문예반이 아닌 원예반 활동을 했고, 그의 꿈은 시인·소설가가 아닌 식물학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곳곳에는 꽃과 나무에 대한 내공을 느낄 수 있는 묘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둔황의 사랑>에서만 해도 ‘그녀(금옥)의 어머니는 두 눈이 겨우살이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는데’, ‘산이스랏나무를 타고 칡덩굴의 새순이 길게 뻗고 있었다’, ‘시든 나팔꽃 같은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와 같은 다양한 식물 표현들이 나오고 있다.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에 기생해 사는 나무로, 콩알만 한 연노란색 열매를 맺지만, 붉은색 열매를 맺는 겨우살이도 있다. 산이스랏나무(산이스라지)는 산앵두나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각지의 낮은 산에서 자라는 나무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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