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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아버지의 빈집

회색빛 저승땅거미가 후루룩 날아올랐다. 봄의 속삭임이 초록으로 물든 공원묘지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바람결에 조화가 현란한 무당춤을 춘다. 시간은 봄바람을 타고 머리카락, 손가락, 어깨너머로 은비늘처럼 빠져나간다. 푸른색 포도주를 가득 채운 유리잔에 투영되는 시간의 파편들이 쑥국새, 멧비둘기 합창 속에 무논으로 녹아내리고 있다.

찌걱찌걱! 군데군데 버짐처럼 녹슨 철 대문을 열어젖히자 개망초, 고들빼기, 잡풀들이 폐허의 행성을 점령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다. 평생을 바쳐서 마련한 삼 칸 집! 어머니 먼저 보내시고 십 년 넘게 위리안치 되어 머물다 간 곳이다.

마루로 오르기 위해 뻐걱거리는 문을 열자 손바닥 남짓한 문지방 위엔 빛바랜 액자만 추억에 잠겨 있다. 진갑기념 가족사진, 사각모 쓴 막내아들 졸업식, 서울 나들이에서 찍은 딸과의 모습. 살갑게 반추되는 기억의 저편만 긴 안식의 레일 위에 멈춰 있다.

안방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윗목에는 묵은 때 낀 뿌연 돋보기, 신호음 가지 않는 왕눈이 버튼 전화기, 재떨이, 구불구불 큼지막하게 쓴 지인의 전화번호가 한쪽 벽면에 크로마토그래피처럼 번져있다.

그해 이월 말 영화원으로 가던 길을 돌려본다. 십여 년을 혼자 보내며 말년에는 실례도 한 그 방에 마지막 미련도 모두 갖고 가야 자식들에게 이롭다고 영정을 보듬고 온몸으로 방바닥을 뒹굴었다. 냉이 싹 오르고 매화꽃 피는 그 길이 이승의 마지막인데 뽑을 수 없는 앓던 이를 뽑았다는 묘한 기분이 교차했다.

언제나 혼자인 것이 안쓰러웠지만 경화된 시멘트 같은 그 성격이 싫어 자식들은 멀리했다. 입동을 지나 찬바람이 더해지는 어느 해 섣달이었다. 잔뜩 울적한 마음으로 해시를 지난 시각 대문간에 선 일이 있다. 바람은 뒤란의 대숲을 뒤흔들고 오 촉짜리 백열등 불빛 속에 졸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눈물을 훔치며 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버지 삶의 주요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오래된 옷장에는 며느리에게서 받은 예단이 벽장 속에는 화투 한모, 다 피우지 못한 장미 담배 한 보루, 녹슨 공구가 만물상을 벌이는 연장통,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전기면도기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평생 붉은 포도주만 채운 줄 알았는데 푸른색 포도주도 아닌 백포도주만 유리잔에 담겨 있다.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숨죽인 날들은 쉬이 태워지지 않았다. 마지막 유골을 확인하는 순간 회백색 가루와 뼈 몇 조각, 그을린 의치만 숨을 죽이고 있다. 저것이 아버지 평생의 주요소였을까? 그 회한을 영영 부수기라도 하듯 믹서에서 퍼지는 금속 파열음은 삶의 재고를 알 수 없는 목숨의 숙명이란 분명 젊은 사람 늙은 사람을 차별화하지 않는다는 커다란 기흉을 새겼다.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다. 결실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지만 시간은 독을 묻힌 화살촉처럼 뚫린 구멍 속으로 잘도 빠져나간다. 몹쓸 사냥꾼이다. 그 속에 아버지도 있었고 지금 나도 있다.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간 아버지와의 시간을 찾아 조각조각 꿰매면 예쁜 목도리를 두를 수 있을까?

아버지의 삶은 천둥벌거숭이였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다. 정방형 집의 마당을 골목이 좁고 긴 안집에 내어준 후 사다리꼴로 변했다. 삼십 년 전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당장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마당을 떼어 파는 것이었다. 도회의 달동네에서 살던 형님 내외가 겨우 병원비를 마련하여 퇴원하는 날 안방에는 고성이 오고 갔다. 큰아들 명의로 된 집을 마음대로 손을 댔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그게 부자간의 실금이 되어 잊을 만하면 덜 치료된 충치의 신경처럼 되살아난다.

언젠가 혼자서 조석을 해결하는 게 힘들어서인지 외로움에 지쳤는지 큰 아들 내외가 있는 도시로 갈 것이라며 주섬주섬 옷을 꺼내 보따리에 싸고 풀기를 반복한 일이 있었다. 결국, 도시에 가면 귀양살이 눈치 살이라며 주저앉는 모습에 시원섭섭한 내 마음은 또 다른 얌체공 이었다. 그 후 평생 혼자 생솔가지를 부러뜨리며 세상에 오직 한 종뿐인 은행나무처럼 아버지란 이름으로 스러질 때까지 그렇게 머물던 집이었다.

인적 없는 집, 낮아진 처마엔 더는 제비들이 들지 않는다. 요즘처럼 제비들의 지저귐 소리가 들리던 이른 새벽에는 아버지의 푸른 발걸음소리와 어머니의 부지런한 숨결 소리가 인화되어 있다. 그런 새벽은 부드럽고 아름다움으로 사방에서 출렁이는 살아있는 시간으로 행복감에 젖어 늦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날은 언제나 또 다른 폭풍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평화를 며칠 담지 못하고 자신이 감은 고치 속 삶을 알코올로 일탈을 시도하며 폭풍우를 쏟아냈다. 그런 날은 별빛이 초롱초롱해질 때까지 담벼락에 기대있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의 서슬이 너그러워진 다음에야 새벽을 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헛간 속에 세월의 더께를 쓰고 있는 지게를 본다. 등짐으로 한평생을 살면서 본인의 뜻에 맞지 않을 때는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부숴버리고 다시 짜 맞추기를 반복하는 정․반․합이 삼각형으로 서려 있다. 그 피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을음을 단청처럼 뒤집어쓴 서까래는 헛간에서 부엌으로 이어져 있다. 알매가 떨어진 흙 바람벽은 갈비뼈만 드러낸 채 바람만 드나든다. 녹슨 가마솥 반대편엔 솔가지 삭정이가 파삭거린다. 아궁이에 거미줄을 걷어내고 성냥만 그으면 모든 것이 화르르 깨어날 무성영화 같다.

아버지! 그는 돌담 아래 납작한 민들레처럼 낮은 운명을 타고난 사내였다. 장딴지 살 빼고 뼈까지 깎아야 하늘을 날 자격을 얻은 새였다. 살아생전 방에서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화장실 가는 집에서 살아보는 게 원이었던 어머니의 한이 아버지 가슴에 대못이 되었을까?

유월 찔레꽃이 지천으로 수더분하다. 그 꽃술은 어머니의 광목 치마 저고리 같다. 내가 잘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은 미웠든 고왔든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전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주유소나 내 삶의 주유소나 다를 게 뭐 있을까?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오월의 봄을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자고 외출 제안을 했지만 각자 자기 할 일에 바쁘다고 너스레만 둘러댄다. 정한 시각이 가까워지자 쓸쓸함만 흘러든다. 품에 들어서 자식이지 크면 모두 제 주장에 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매운탕을 끓이면 가운데 살점은 언제나 아이들 몫으로 가고 아내와 나는 머리와 꼬리 차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유난히 옷 갈아입는 것을 싫어하셨다. 근육질이었던 팔다리는 홍수가 지나고 뼈만 남은 논바닥처럼 변했다. 그래서 지탄의 목소리가 담을 넘는 것이 주말 통과의례였다.

아버지의 빈집! 그곳엔 여전히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있고 손 떼 묻은 농기구는 정겨움을 준다. 하지만 더는 재생 하고 싶지 않다. 헤어짐은 죽음의 완성이다. 아버지는 나와 같은 또 나이다.
예닐곱 아이들을 보면 참 예쁘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뼈가 세어져 자신의 그늘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가 더 높아지면 나도 언젠가 부고를 전할 것이다. 삶의 선물이라는 부고는 그 선물을 반납하는 절차이다. 죽음은 다음 계절을 예약하지 않는 서사이다. 그때 한 자리에서 아버지의 회초리를 맞을 수 있을까? 삶이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는 것들 속에 사는 목숨이 갖는 슬픈 한계 존재의 이치로 살아있다는 것이 파도처럼 몸을 뒤집는다.

진해지는 유월의 여름 속으로 내 마음 한 자락을 들어내 걸어 들어간다. 젊은 힘의 긴장과 이완, 나이 먹음은 어제와 오늘의 차이뿐이다. 삶의 색과 무게를 추억하는 일은 반야심경을 외는 가슴만큼이나 처연하다. 삶의 경영이 녹록지 않아도 담담히 나아가는 것이 아버지의 빈집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오일장 이른 새벽 골목길. 다섯 걸음 가고 숨 돌리는 할머니들의 자식 자랑 이야기가 먼동 속에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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