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눈앞의 한순간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과거와 그 뒤에 이어질 미래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사진 속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시간의 깊이도 온전히 보여 주지 못한다. 하나의 거대하고 평평한 화강암 바위가 품어 온 세월과 가치를 어찌 사진 한 장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수천 년 동안 흐르는 물을 받아 내며 몸을 깎고,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과 이애기를 기억해 온 바위의 이야기는 사진만 남아 있다. 금강산을 갈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정부의 햇볕정책과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등으로 남북 화해의 물꼬가 트이면서 1998년 11월 18일, 동해항에서 금강산 관광선이 처음 출항했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북한의 장전항으로 들어갔고, 2003년부터는 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육로도 열렸다. 나는 금강산을 두 번 찾았다. 한번을 바닷길로, 또 한 번은 통일교육으로 육로로 다녀왔다. 첫 번째 방문을 앞둔 전날, 우연히 금강산 사진전을 보았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금강산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사진이니까 저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튿날 실제 금강
2026-09-30 10:19밤중에 도착한 메시지를 늦게 확인했다. 아침에야 쓰게 되는 답장이 늦은 까닭은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의 온라인 강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100시간의 이론과정을 이수하고, 이어 20시간의 실습을 마쳐야 국가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내년부터는 실습이 현장 중심으로 바뀐다는 정보를 접하고 서둘러 올해 과정에 등록했다. 국민내일배움카드로 교육비 일부를 지원받아 시작했지만, 추석을 지내느라 이틀간 강의를 듣지 못한 대가는 컸다. 밀린 강의가 산처럼 쌓여 며칠 동안 밤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했다. 평생 한글을 읽고 쓰고 가르쳐 왔으니 한국어 공부쯤은 익숙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어를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문법과 발음 원리를 이론으로 풀어가는 공부는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말을 ‘왜 그렇게 쓰는가’ 설명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배움이었다. 누군가는 이 나이에 왜 다시 자격증 공부를 하느냐고 묻는다. 공부할수록 자격증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증서가 아니라, 새로운 봉사를 시작하기 위한 작은 열쇠라는 생각이 든다. 퇴임 후 간호대 초빙교수로 근무하면서 다문화간호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다. 결혼이주여성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무료로 제
2026-09-29 17:30
추석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작천정 계곡을 찾았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세월은 아이를 부모로 만들었지만, 계곡을 이루는 너른 바위는 옛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가뭄으로 계곡에 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시원한 물속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기대했던 터라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물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바위가 온몸을 드러냈다. 계곡 전체가 하나의 큰 바위 놀이터가 되었다. 물이 없어 비어 보였던 계곡은 오히려 더 넓은 놀이터와 살아 있는 자연 교실을 내어 주었다. 작천정은 ‘작(酌)’에는 술을 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계곡 바닥에는 크고 작은 홈과 굽이진 물길이 새겨져 있다. 흐르는 물이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바위를 다듬어 만든 자연의 작품이다.넓고 반반한 바위가 마치 옥판을 펼쳐 놓은 듯하고, 오랜 세월 물살에 깎인 바위 구멍은 술잔과 술을 따르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가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닦았다고 전해지는 곳으로경치가 아름다운 유원지를 넘어 자연과 학문, 선비의 절개와 배…
2026-09-28 16:11나이가 들어가니 젊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 예전 취미로 하던 운동은 일이 되었고 공부는 취미생활이 되었다.나는 운동 중에서 수영과 걷기를 선택했다. 일주일에 3일은 수영을 하고 다른 날은 걷기로 채운다. 비록 늦게 시작한 수영이지만 참 잘한 일 중 하나이다. 소식을 하는 나로서는 땀을 흘리면서까지 하는 운동은 체력이 감당하지를 못한다. 물론 처음 몇달간은 힘들어서 다녀올 때마다 궁시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응원해 주었다. 지금 그만두면 영원히 못한다고. 걷기로는 동네 중앙공원과 탄천길을 걷기도 하고 특히 연금공단에서 운영하는 시니어 모델워킹을 한다. 한달에 한 번씩 자원봉사쇼를 하는데 이를 위해 사전 워킹을 연습한다. 평소 하고 싶었던 시니어모델 활동으로의 만족감과 봉사도 겸하니 금상첨화다. 일반 모델처럼 의상비 등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참여자들이 모두 공무원 출신의 은퇴자들이라 동질감도 있어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출석에 대한 부담도 없다. 행사 시 원하는 사람이 신청하면 그네들만 참여하는 구조이다. 드레스코드는 운영진에서 정해준다. 세미정장, 바바리, 진, 휴양룩 이런 식이다. 현직에 있을 때도 남들은 운동을 했었겠지만 난 역부족이었다. 잠
2026-09-21 13:17‘초롱이’는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교육 채널에 등장하는 개구리 주인공이다. 초롱이는 어린이들과 함께 숲속을 여행하며 중독과 감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어려운 내용을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이솝우화의 동물 이야기 형식에 재미와 상상력을 더해 창작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고 있다. 마약이나 술, 담배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린이들이 “왜 먹으면 안 되나요?”, “우리 몸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뇌의 보상회로, 중독이 일어나는 과정, 술이 몸속에서 분해되며 생기는 유해물질, 손을 씻지 않았을 때 병균이 퍼지는 과정 등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 속에 담았다. 동화의 주제를 정하고 장면을 구성하며 대사를 쓰는 과정에는 AI가 함께한다. AI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친구이자 자료를 정리하는 비서이고, 궁금한 내용을 찾아 주는 지식 창고이기도 하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나는 마치 ‘이동식 교육 콘텐츠 기획실’을 운영하는 사람이 된 듯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방향을 정하고 내용을 선택하는 일은 온전히 교사의 몫이다
2026-09-21 13:11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책가방을 들지 않고 학교에 갔다. 머리에는 청색 머리띠를 두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섰다. 책가방 없는 등굣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했다. 운동회는 대개 추석 무렵에 열렸다. 타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오는 때라 온 가족이 함께 운동회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달리기와 무용, 응원 연습을 했다. 운동장은 아이들의 구령과 발소리로 가득했고, 청군과 백군의 함성은 가을 하늘 높이 퍼져 나갔다. 초등 1학년 때 나는 여섯 명이 함께하는 현대무용 공연에 뽑혔다. 키가 작아 맨 앞줄 가운데에 섰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자리는 어린 나에게 무척 무담되었을까, 아니면 철없어 담담 했을까?돌이켜 보면 그때 받은 관심과 칭찬 속에서 내 자존감도 작은 싹을 틔웠을 것이다.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던 날 추석에 큰언니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가 날마다 기다렸다. 연습을 마친 뒤에도 언니가 타고 올 저녁 버스를 기다리는그리움은 지금의 표현으로 사무침 같은 것이었다. 인내가 어려운 시기 지금의 손녀손자가 초1학년 또래의 정서였다.‘오늘은 언니가 올까.’ 어린 마음에 품었던 그리움은 해마다 추석
2026-09-21 13:09“안녕하세요, 교수님. 지난번 자기소개서와 면접 준비를 도와주신 덕분에 합격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학생에게서 반가운 문자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흘린 땀과 새로운 출발을 앞둔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에게도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귀한 선물이었다.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전공과목을 다룬후 자기소개서 작성과 면접 준비에 관한 내용을 미니 특강으로 하였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는 일부터 어려워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몇 장의 서류에 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진솔함’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구체적인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의 힘이 약해진다. 반면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경험이라도 그때의 생각과 행동, 그로 인해 달라진 점을 진솔하게 담아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된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보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작
2026-09-21 13:08최근 우연히 달력을 넘기다 순간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내 나이 어느덧 우리 나이로 예순일곱, 주민등록상 정년이 만 62세였으니, 벌써 몇 해가 흐른 것이다. 교단을 떠난 뒤의 시간은 교단에 있을 때보다 이상하게도 훨씬 빠르게 흐른 것 같다. 그래서 삶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해 달려간다고 하는가 보다. 속도 계기판에 찍힌 속도가 시속 67km였으니 말이다. 학교에 있을 때는 시속 40~50km로 하루가 그렇게 천천히 지난다 싶더니, 학교를 떠나고 나니 이젠 “세월이 유수(流水)처럼” 한 해가 한 계절처럼 지나가고 있다. 40년. 참 긴 세월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의 가장 싱싱한 시절을 학교에서 보내며 정열과 사도(師道) 실천의 거룩한 임무를 다했다. 아직은 앳된 청년의 얼굴로 교단에 들어가 어느덧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어 순백의 머리칼로 치장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 사이 대한민국 교육은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었다. 교과서가 바뀌고, 입시제도가 바뀌고, 교육과정이 바뀌고, 컴퓨터가 교실에 들어오더니 스마트폰과 인공지능까지 학생들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순수한 꿈을 꾸었고, 나는 교사로서 여전히 그 꿈을…
2026-09-21 13:07앞판과 뒤판을 정성껏 깎고 붙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바이올린 소리통을 완성했다. 아직 현을 얹지도 않았는데 나무를 쓸어보는 손끝에서 벌써 맑은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에는 바이올린제작학과가 있다. 강의 일정을 고려해 학부에 입학하면서 나는 가르치는 교수인 동시에 배우는 학생이 되었다. 건물과 건물을오가며 가르치고 배우는 생활은 낯설지만 설레는 도전이었다. 다시 학생의 자리에 앉으니 미처 보지 못했던 교육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바이올린 제작은 날카로운 도구를 익히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붙이는 모든 과정이 새로운 세계였다. 처음에는 칼을 쥔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나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깎이기도 했다. 마음이 앞선다고 나무가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서두르면 흠집이 생기고, 작은 실수 하나가 다음 공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나무 앞에서는 기다림과 집중이 필요했다. 호기심은 열정으로 바뀌었고, 그 열정은 오랫동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바이올린 제작의 역사에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특히 1700년부터 1720년대 중반까지는 그의 ‘황금기’로 불린다. 이
2026-09-20 20:48딸이 20년 만의 대학 동창회에 간다고 했다.초등학교 1학년인 쌍둥이와 함께 여행을 겸해 1박으로 다녀올 계획이었다. 금요일 하루는 학교에 체험학습도 신청했다.‘아이들까지 학교를 쉬게 하면서 꼭 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딸에게 이번 동창회는 단순히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다. 결혼 10년 동안 쌍둥이를 키우며 가사와 육아에 온 힘을 쏟아온 딸이었다. 잠시나마 ‘누구의 엄마’와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오랜 친구들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나는 두 아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고서야 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 글씨가 반듯한 아이는 편지지를 가득 채웠다.“엄마, 매일 행복하게 지내자. 언제나 엄마가 슬프면 말해. 사랑해.”동그랗게 그린 엄마 얼굴 주위에는 사랑의 표시도 가득했다. 다른 아이는 이렇게 썼다.“엄마, 언제나 기쁘게 살아. 엄마 슬픔 다 알고 있어. 용기 내. 사랑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쓴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깊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와 표정 속에서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까지는 몰랐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법으로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2026-09-17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