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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6.25 전쟁의 발발

1950.6.25. 새벽 김일성은 38선 일대에 모든 병역과 무기를 옮겨놓고 전쟁을 일으켰다. 당일은 일요일이었다. 남한은 국방군이 있었지만 전쟁은 꿈도 꾸지 않아 외출과 휴가 등 평화로운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북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적 침공에 우리 군은 속절없이 후퇴만 거듭하여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잃고 전국에서 공산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김일성의 치밀한 전쟁 준비 때문이다.
전쟁 초기 남한은 병력과 무기 모두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력의 규모는 물론 소총도 쏠 줄 아는 훈련된 병사들이 많지 않았다.
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 비교 통계를 살펴보면 남한이 총병력 103,827명, 육군 94,974명 육군 전투병역 67,416명 (8개 사단•22개 연대) 해군 6,956명, 공군 1,897명으로 나타났으며 북한(인민군)은 총병력 201,050명, 육군 182,680명, 전투병력 120,880명 (10개 사단•30개 연대), 해군 15,570명, 공군 2,800명 등 북이 두 배 이상 우월했다.
뿐만 아니라 전투기, 전차 등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무기도 남한에는 연습기 10여 대뿐이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소련제 T-34 242대와 전투기 170여대를 보유한 상태로 전쟁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김일성은 수차례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만나 한국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지지를 얻어내려 애썼다. 박헌영도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봉기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고 옆에서 김일성을 도와주었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병력과 국토가 황폐화되어 한반도 전쟁 의지가 크지 않았고 중국은 마오쩌둥이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쫓아내어 건국 준비에 바빴다.
하지만 김일성의 설득으로 한반도를 자신들의 세력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족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국공내전을 치뤘던 중국내 조선의용군 2~3만 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 북으로 보내 조선인민군을 증강을 돕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핵실험 성공, 미국 태평양 방어선 애치슨라인 공표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는 한반도 전쟁 개입 유혹을 떨치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마침내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얻어내고 무기를 지원받으며 군사훈련까지 받은 군사를 남한의 두 배나 증강하여 개전 초 3일 만에 서울을 빼앗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탱크 240가 초기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울을 차지한 북한군은 웬일인지 3일이나 머물러 그들이 원하던 승리를 놓치는 결정적 요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개전 초 서울을 빼앗은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3일이나 서울에서 지체하게 한 이유를 분석한 오늘날 자료를 살펴보면 탱크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은 도로가 발달된 평지 전투 (서부전선, 동부전선)에는 효율적이지만 산악전투(중부전선)에는 비효울적이어서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의도는 서울에서 중부전선 부대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의 중부전선(특히 춘천전투)에서 고전하여 3일이나 지연시킨 한국군 때문 서울에서 3일 동안 지체하게 된 것이라는 견해다.

이렇게 북의 군대는 서울에서 3일을 더 머물러 일주일이 되어서야 한강 이남을 내려오게 돼 한국군 방어망을 구축 할 수 있었으며 미군과 유엔군 개입 여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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