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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師弟) 이야기

군자삼락(君子三樂)
부모구존 형제무고(父母俱存 兄弟無故)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득천하영재 이교육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맹자의 진심편(盡心篇)에 나오는 군자삼락(君子三樂) 즉,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교직에 있는 사람들을 칭송할 때 자주 쓰곤 한다.

퇴직을 한 교육자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 중에 삼락회(三樂會)라는 것이 있다. 그것도 여기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교총회관에 사무실도 있고 정부로부터 상당한 지원과 보조를 받는다고 하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나도 교직에 반세기를 몸바친 사람인데, 그 장구한 세월을 애오라지 교육에 매진했다면 공자의 말대로 삼락을 이루었으니 내가 지금 죽어도 부러울 것이 없고 살아도 행복한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자꾸 낯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인 일인가.

지나간 그 세월 속에 부침(浮沈)하는 제자들을 헤아린다면 가히 기만(幾萬)은 넘을 것이지만 서로 사제지간(師弟之間)이라고 일컫는 제자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제자는 있는데 스승이 없다면 뿌리가 없는 나무가 있다는 얘긴데, 그게 엄연한 현실인 걸 어쩌랴.

제자 없는 스승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보면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육예(六藝)1)에 통달한 제자를 77현(賢)이라 하고, 이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제자 열 명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테면 논어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덕행으로 뛰어난 안회(顔回)라든가 언변이 뛰어난 자공(子貢), 그리고 정사(政事)에 남다른 자로(子路), 문학 분야에 특출한 자유(子游)나 자하(子夏) 등을 일컬어 공자의 대표적인 문하생이라 하고 스승과 제자관계를 맺게 된 셈이다.

이렇게 보면 성인(聖人)도 자신의 공로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에 의해 이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스승도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제자가 없으면 스승도 없다. 제자들이 스승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스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물경(勿警) 45년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중에는 청문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판 · 검사는 물론이고 변호사, 법무사 등 법조인도 있었다. 의사와 교사들은 너무도 많고 어떤 정권에서는 날마다 신문에 나오는 고위 공무원도 있다. 외국으로 이민 가서 출세를 한 사람도 있고 각계각층에서 기업가,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이 중에서 제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저들이 나를 스승이라고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저들을 보고 제자라고 부를 수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스승’이 아니라 ‘선생’일 뿐이다. 이른바 ‘선생질’을 함으로써 소정의 월급을 받고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을 전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면서도 그 과정을 통해 인격을 도야하고 덕성을 길러주던 훈장만 못한 사람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중에도, 내가 가르친 아이들 중에는 지금도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사람이 있다. 나와는 5, 6년 차이라서 음식점에서는 나를 선생이 아닌 동창생으로 자주 착각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시내의 제법 이름 있는 음식점에서 동창회를 한다고 나를 불렀다. 로얄 박스까지 마련했지만 나는 극구 사양하고 회원들과 함께 섞여 앉았다. 오랜만에 나오는 동창생 한 사람이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악수하더니 내 앞에 와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망설였다.
“ 야, 너는 처음 보는 애 같은데? 누구냐? “
“….”
“ 이름이 뭐냐 말이야~”
앉아 있던 아이들이 고개를 움츠리며 키득키득 웃었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그 제자는 계속 나를 보고 물었다.
“얌마- 너 우리 동창 맞어? 동산국민학교 1회 동창 맞냐구?”
잘못하면 그 애(애가 아니라 늙은이)가 선생인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아서 아이들이 서둘러 소리쳤다.
“야, 이원구 선생님이여!!”
그러자 그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엎드려 절을 하고 두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다.

모두 1959년, 약관의 나이에 내가 세 번째로 부임한 D초등학교 졸업생들이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 있는 최고(最古)의 오지 마을, 기차는 구경하지 못하고 비행기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있는 곳. 1주일에 한 번씩 들어오는 버스 편으로 신문이 아닌 구문(舊聞)을 통해 겨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는 문화의 고도(孤島). 6 · 25 때는 빨치산의 본거지. 수복이 되고서 더욱 피를 많이 흘렸던 곳. 고작 교실 두 칸, 그것도 칸막이를 해 1, 2학년은 복식(複式)수업을 하던 학교.
나는 거기서 6학년을 담임했다. 50~60명 아이들 모두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다. 인근에는 중학교도 없었지만 있다고 한들 가난한 살림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들이다. 점심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무말랭이와 풋고추 몇 개가 전부였고 그것도 없는 집에서는 고구마를 삶아서 보자기에 둘둘 말아서 온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나는 거기서 교사로서의 애정과 열정을 가장 많이 바쳤던 것 같다.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방정식은 배워야 쓸데가 없고 음악 같은 것은 사치스러운 과목이라고 여겨 교육과정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교장이 국가에서 만든 교육과정을 교사가 맘대로 바꾸면 법을 어기는 행위라면서 극구 말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대로 했다. 이후부터 교장은 나를 이단아로 취급해 해당 교육청의 문제 교사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국어 시간에는 교과서 대신 천자문을 가르쳤다. 서당식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교수-학습 방법도 없이 무조건 암기하고 계속 쓰는 것뿐이었다. 열 번씩 읽고 열 번씩 쓰기를 매일 강요했으니 그것은 학습이 아니라 노역(勞役)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볶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학부모들도 이상한 선생이라고 별견시(瞥見視)하다가 마침내 아이들이 당시 한문이 많이 쓰였던 신문을 읽게 되자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했다.

음악 시간에는 오르간이 없었기 때문에 하모니카로 동요 대신 우리 가곡과 외국 명곡을 가르쳤다. 한번은 서울에서 동창회를 하면서 모두 거나해지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스코틀랜드 민요 ‘아 목동아’를 부르고 ‘메기의 추억’을 합창해 가슴을 설레게 한 일이 있었다.
저들은 그렇게 공부를 하고 졸업을 했다. 졸업식 날 나는 그들을 불러놓고 일장 훈시(?)를 했다. 훈시라고 하기보다 그건 일종의 선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졸업하면 모두 이 산골을 떠나라. 밖에는 여기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단다. 자기가 노력만 하면 돈도 벌 수 있고 학교도 갈 수 있단다. 다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고 최선을 다 하거라.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마지막 당부다.”
나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다. 나는 저들이 불쌍해서 울었고 아이들은 마지막 졸업이라는 것이 원통해서 울었다.
이후, 나는 군에 입대해 오래도록 저들과 헤어져 있었다. 나중에 소문을 듣자니까 졸업하고 난 다음에 저들은 다투어 가출(家出)을 감행했던 모양이다.
몇몇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와 밑바닥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아이들은 삼삼오오 동창회를 만들어 서로 의지하면서 향수를 달랬고 언제나 그 자리에 나를 초대해 ‘은사’라고 불렀다.
이들이 나를 ‘스승’이라고 불러줌으로써 나와 그들은 사제간(師弟間)이 되었다. 5월이 오면 이들이 서툰 솜씨로 이메일을 보내 안부를 묻기도 하고 더러는 찾아와 함께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문득 여러 제자 중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A 군이 생각난다.

시인이 된 제자 A 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했던 제자다. 그가 항상 나를 깍듯이 은사(恩師)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도 분명히 그를 제자라고 부른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용모도 단정한데다가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운동장의 여러 아이들 중에 자주 눈에 띄던 이른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중 · 고등학교에 가서도 각광을 받아 마침내 여러 학생들이 선망하는 S대 체육과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고 대학을 마치고 서울에서도 이름 있는 J고등학교 체육선생님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이유 없이 시름시름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여러 번 동네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았으나 신통치 않았다. 급기야 하반신에서 마비가 오는 것을 느끼게 되자 종합 병원을 찾았다. 병세가 깊어가면서 온 가족과 함께 유명 대학병원을 비롯해 국내 저명한 의사들을 찾아 백방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는 ‘급성횡단성연수염’으로 하반신 불수가 되고 말았다. 감기 바이러스가 척수로 옮겨 요추(腰椎) 5번까지 마비가 된 것이다.

죽음 직전에서 생명을 건진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하루아침에 직장도 잃어버리고 장애인이 된 그의 휠체어를 밀면서 자꾸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참느라고 무척 힘들었다.
마침내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뜻? 그렇다면 내가 생각할 때 그건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다 성숙된 신앙으로 자신의 모진 운명을 달래고 삭히면서 영원히 불구가 된 몸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문학에 매진한 결과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네바퀴>라는 장애인 단체에서 시작(詩作)과 잡지 편집, 신앙 간증과 강연을 하면서 바쁘게 일하고 있다.
그가 자주 찾아와 나와 함께 담소할 때마다 자꾸 연민스러워하는 나를 그는 도리어 위로하고 수시로 나에게 문자를 보내며 선교하는데 힘쓰고 있다. 아직도 나는 ‘신은 있는가?’를 되뇌고 있는데 그는 무한히 넓은 마음으로 신의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나를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심안(心眼)의 초점에서 벗어나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신에 대한 갈등을 조금은 해소하게 되었고 그의 값없이 보내는 축복을 통해 진정 감사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됐다.
그는 항상 나를 ‘은사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그의 스승이 되었다.

차마 다시 못할 제자의 문상(問喪)
오래도록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 다른 직역(職域)에서는 겪을 수 없는 체험을 많이 하게 된다.
1학년을 담임했을 때의 일이다.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한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서 갑자기 그 위에서 큰일(?)을 저질렀다. 벗기고 씻기고 체육복으로 갈아입혀 교실에 들어오자 아이들이 코를 잡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 애를 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을 막아 보려고 “나도 어렸을 때 똥을 싼 일이 있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똥 싸 배기 선생님’이라고 놀렸다. 비장의 카드를 쓴다고 한 것이 결국엔 그 아이에게 갈 오명(汚名)을 내가 뒤집어쓰고만 것이다.

어느 해인가 5학년을 담임하고 있을 때에는 운동장에서 흰 체육복을 입고 초경(初經)을 하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임신과 출산을 연계해 매우 차원 높은 성교육을 해본 일도 있다. 크고 작은 일을 따져보면 교실에는 하루도 영일(寧日)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사안 중에서도 세계적인 명사가 되어 나라 이름을 빛내던 젊은이가 암으로 죽어 그 영정 앞에 내가 서야 했던 것은 차마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S국민학교 3학년 때 가르쳤던 아이다. 공부도 잘했고 예능에 두루 소질이 있는데다 얼굴도 예쁘고 태도도 바른 아이였다. 잠재력을 발휘하더니 고등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했다. 고교 졸업 후에, 시내 유명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더니 미국 회사에 취업해 몇 년 안에 세계적 명사가 되었다.

그런 그가 2011년 2월, 갑자기 귀국해 골수암으로 A병원에 입원하고 두 달을 넘기지 못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유난히 나를 따라서 외국에 있을 때에도 자주 메일을 주면서 끈끈한 사제의 정을 쌓았는데 끝내는 나보다 먼저 가고 말았다. 통분할 일이었다. 문상(問喪)은 갔지만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들고 나는 너무도 서러워서 오래도록 몸을 가누지 못하며 흐느꼈다. 나는 그의 가족들이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정신없이 “나쁜 놈! 나쁜 놈”만 외치다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 부모의 뜻에 따라 그가 살던 부암동 뒷산 인왕산에 수목장(樹木葬)을 했다. 이따금 내가 광화문에 나오는 길에 문득 인왕산을 바라보노라면 병실에서 커다란 눈에 웃음을 머금고 “선생님 미안해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날, 그 슬프던 날, 그의 영전에 바쳤던 시를 여기에 실을 줄은 정말 몰랐다.

령아, 사랑하는 령아, (‘령’은 그의 이름 끝 자이다)
서글서글한 눈 속에 꿈이 가득하던 소녀가
책상머리에 네 꿈 그대로 두고
어디로 갔니.
각박한 세상 시달리다 시달리다
네 사랑 아빠 엄마 그대로 두고
차가운 하늘 길
어떻게 갔니
령아, 사랑하는 령아,
이제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편히 쉬다가
부암동 옛집에
봄꽃 피거든
훈훈한 바람 되어 다시 오너라
한 마리 나비 되어 다시 오너라.
- 사랑하는 ‘령’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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