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동행> 막장광부와 독일인 ‘박사아버지’
1967년, 파독광부 3년 생활 끝에 귀국을 준비하던 내게 당시 수양어머니 로즈마리 여사는 계속 남아 유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독일어 실력은 물론 등록금 준비, 체류 연장 등 해결해야 할 산적한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귀국길에 오르려던 나를 만류하기 위해 공항까지 달려 나온 수양어머니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달랑 몸만 독일 땅에 남게 됐다. 당시 나의 전 재산은 입고 있는 옷과 신발, 용돈 몇 마르크(당시 독일화폐)뿐이었다. 우선 불법체류자로 강제 추방당하지 않고 신변을 보호받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급한 대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벨기에 군대내 군수품 보급소에서 임시직 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수양어머니 말씀에 따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장기체류 절차를 3개월 안에 밟아야했는데, 의외로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 순조롭게 진행돼 여름학기부터 수강할 수 있었다. 솔직히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외국인 신분의 나에게 대학이 왜 입학허가를 줬는지 모른 채 살고 있다. 지금까지도 스스로 의문을 안고 살아 왔고, 아마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외로운 독일
- 권이종 아프리카아시아 난민교육후원회(ADRF) 회장·한국교원대 명예교수
- 2016-06-17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