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나다니엘 호돈의 단편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늘 산 위에 새겨진 거대한 얼굴을 바라보며 자란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저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니스트 스스로 그 얼굴을 마음에 새기며 자신을 갈고닦아 결국 그 모습을 닮아 간 과정이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스승 빈곤의 시대’를 떠올리면, 이 이야기는 마치 지금의 교육을 위해 쓰인 우화처럼 읽혀진다. 아이들은 늘 누군가 인생의 모델을 바라보며 자란다. 문제는 이제 그들이 바라볼 ‘큰 바위 얼굴’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는 첨단 기술과 콘텐츠로 가득해졌지만, 아이들이 정작 갈망하는 건 지식보다 삶의 방향을 보여줄 한 사람이다. 페스탈로치가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손에 흙을 묻히며 “사랑은 교육의 기초”라고 말했던 것처럼(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1781), 참된 교육은 말보다 삶의 증명에서 비롯된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제자에게 “학문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고 가르친 것(다산시문집)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시대가 달라도, 위대한 스승은 모두 제도의 언저리가 아닌 삶의 중심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오늘의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 속의 ‘난징대학살’은 1930년대 중후반에 있었던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에서 발생한 3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 집단 대학살에 대한 것으로 단편적인 사실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난징 사진관’이라는 영상을 통한 처참한 전쟁의 이면에 들어가 보면 전쟁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인류의 참극임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만나게 된다. 이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경각심을 다시금 오늘에 상기시키는 일종의 현대판 역사교육으로 그 효과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영화 ‘난징 사진관(原題 《南京照相馆》)’은 단순한 역사 드라마를 넘어, 우리가 왜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의 옛 수도 난징(南京)에서 벌어진 집단대학살을 배경으로, 사진관 속 필름 한 통이 밝혀낸 역사의 진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고 역사 앞에 보다 용기와 정의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서사를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전쟁터의 영웅이나 거창한 항쟁보다는 ‘우편배달부’, ‘사진관 견습생’, ‘사진관 주인’ 등 평범한 사람들의
“내가 떠날 때 누군가의 삶에 빛이 되고 싶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 어떤 이는 세상에 가장 깊고 따뜻한 울림을 남기고 떠난다. 뇌사자의 장기 기증은 바로 그런 기적이자 인간의 숭고한 의미와 행위를 나타낸다. 생명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선택,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선물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기적을 바깥에서 찾는다. 하지만 진짜 기적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심장이 멎어야 할 누군가가 다시 뛰는 것을 상상해 보자.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움튼다. 이 같은 기적을 유발하는 장기 기증은 단순한 의학적 절차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살 수 없을 때, 누군가를 살 수 있게 한다’는 인간의 고귀한 연대의 증표다. 우리는 이러한 숭고한 생명 나눔의 가치를 더불어 살아가는 이름다운 세상을 위해 교육으로 승화할 필요가 있다. 한 생명이 일곱 사람을 살리다 뇌사자는 최대 7명에게 장기를, 수십 명에게 조직을 기증할 수 있다고 한다. 심장, 폐, 간, 신장, 췌장 등 각 장기는 오랜 기다림 끝에 희망을 잃어가던 환자들에게 다시 살아갈 기회를 준다. 누군가는 다시 숨을 쉬고, 누
6.25 전쟁 무렵 태어난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생필품 결핍 시대를 살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공을 차고 싶었지만 축구공이 없어서 돼지를 잡고 난 후 방광에 바람을 넣고 고무줄로 묶어 차고 놀았다. 어른들은 미국 제품인 만년필을 좋아했고, 가정에서는 일본 제품인 코끼리 밥통을 선호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TV를 비롯한 가전 제품은 국산이 대부분이고 로봇 청소기는 중국산에게 국산이 밀려난 것 같다. 도로에는 전에 상상도 못 했던 중국산 버스가 달리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을 중국이 거의 대체해 가고 있다. 이러첨 중국의 파도가몰려 오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경쟁자는 결코 일본도 아니고 중국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며, 지금도 그 와중에 있다.지난 달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 '글로벌 이코노미 아웃룩 2026' 세션에서 거시경제·투자 전문가들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이 촉발한 무역전쟁이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동시에 유발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불법 이민자 추방으로 제조업 노동력이 공급 절벽에 이르며 경기 활력을 저하시킬 것이란 우려도 내놓았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을 향해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서울 종묘에 서면 늘 두 가지 시간이 교차한다. 수백 년 전 왕과 신하들이 걸었던 돌길을 밟는 발끝에선 고요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지만, 고개를 들면 사방을 둘러싼 빌딩들의 유리창이 현대의 속도감을 반사한다. 이 공존의 오묘한 풍경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상징이 되어왔지만, 최근 종묘 인근 초고층 재개발 논란은 그 섬세한 균형을 단숨에 흔들어 놓고 있다.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제1호인 종묘가 보존해 온 시간의 품격과 도시의 욕망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유네스코(UNESCO)는 세계유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완충지대’를 강조한다. 유산이 품은 서사가 훼손되지 않도록 주변 경관까지도 그 유산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종묘가 세계유산 등재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도 ‘한국만의 제례 문화’와 ‘영혼을 모시는 공간으로서의 장엄한 분위기’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장엄함은 건물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의 하늘, 빛, 여백, 소리까지 모두가 하나의 문화적 무대다. 만약 그 공간을 가르는 초고층 건물이 등장한다면, 종묘의 시간은 ‘단절’되고 말 것이다. 이 논란에서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힘은 문화의 힘이다.” 바로 백범 김구
오늘날 우리 주변은 어디를 가든 온통 둘레길로 이어져 있다. 마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서양의 금언과 같이 우리가 사는 길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개는 지자체가 그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를 포함해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끊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고 있다. 각 지방정부는 이를 일명 ‘○○둘레길’ 이라 명칭하고 관리한다.타지역의 방문자들이 불편하지 않게 선명한 이정표를 곳곳에 세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둘레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진짜 배움은 길 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자연주의자인 루소가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진정한 교육은 자연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활용하듯이 최근 몇 년 사이, ‘둘레길 걷기’가 새로운 교육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연을 따라 걷는 이 단순한 행위가 지식을 넘어서 사고력, 공동체성, 생태 감수성까지 자극하는 통합적 교육 수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2024년 이후, 여러 시·도 교육청과 학교 현장에서 ‘둘레길 기반 교육과정’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야외 체험학습의 차원을 넘어, 지역성·생태·인문학을 아우르는 프로젝
입동이 지나 계절의 변화가 다가오면서 찬바람이 교실 창문을 스치면, 고3 학생들의 책상 위엔 어느새 각종 문제집과 형형색색의 형광펜이 수북이 쌓이게 된다. 그동안 하루하루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오직 ‘수능’이라는 이름의 언덕만이 또렷하게 남은 상황에서 우리 수험생들은 이제 그 언덕의 꼭대기에 다다랐음을 불안하게 느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과 사색으로 밤잠을 설치며 견뎌냈는가? 친구들과의 약속을 뒤로하고, 휴대폰을 멀리 밀어놓고, 문제집과 참고서 속으로 고개를 묻던 날들, 때로는 “이 길이 맞을까?”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 노력이 지금의 수험생 여러분을 만들었음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성적표는 숫자로 여러분을 평가할지 몰라도, 여러분이 쏟은 시간과 마음은 그 어떤 수치로도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이가말하듯수능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한 시기, 자신에게 가장 성실할 수 있었던 ‘증거’로 남을 것이다. 시험의 결과가 어떻든, 스스로를 믿고 최선을 다한 하루는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믿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그날의 시험지를 통해 대학으로 향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