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下 모녀 소리꾼 3대의 삶 그려
농악놀이·민요·굿 등 실감나는 묘사
소설 뛰어 넘는 한 질의 역사교과서
보성 수십 번 방문하며 자료수집
원고지 1만4000매…10년간 집필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되살리고파”
“말이라고 헝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허든개비. 명창은 돈 벌라고 헌 짓이 아니랑게. 그런 생각부터 허면 명창이 못되는 법이여. 소리는 예술이랑께. 남이 하지 못한 일을 해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제. 하다 보면 먹고는 살것지만. 그래도 명창이 될라믄 자기를 다 바쳐야 헌당께.”…(중략) “맛난 것 먹고, 고운 옷 입고, 좋은 집에 살려고 허면 소리를 허면 안 되제. 들판에 가서 지게 지고 일을 해야 돈을 벌 것 아닌가. 지게 지고 일하는 사람한테 혼이 있다고는 않제. 그러나 소리하는 사람들은 자기 목숨과 바꾸겠다는 혼이 있어 허는 것이랑께…”(‘소리’ 5권 중)
책을 덮자 걸쭉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머리에 맴돈다. 고수의 북장단에 맞춘 타령에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 덩실 덩실 흥겨운 춤판을 벌이는 장면도 뇌리에 남는다. 구성진 육자배기 가락에 흠뻑 담긴 우리 이웃의 끈끈한 정이 느껴진다.
문학가로서 이렇다 할 명망이 없었던 전직 교장이 8권의 대하소설을 출간해 화제다. 10년 각고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주인공은 정상래(64) 전 경기 승지초 교장. 대하소설 ‘소리’는 남도 소리문화의 본고장 보성 일대를 배경으로 소리꾼들의 삶과 우리 민족을 관통하는 ‘한(恨)’의 정서를 애잔하면서도 구성지게 풀어냈다.
소설에는 주인공 ‘성요’와 그의 딸 ‘민순’, 민순의 딸 ‘수양’까지 3대에 걸친 모녀 소리꾼들의 일생이 담겼다. 일제치하의 가혹하고 비극적인 삶 속에서 명창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했던 어머니와 그 꿈을 잇는 딸, 다시 또 그의 딸에 이르기까지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는 우리 민족의 고달픈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소리꾼들은 백정, 무당, 기생과 같이 조선시대 ‘팔천민(八賤民)’의 하나로 하대 받았어요. 하층민으로 핍박 받으면서도 소리를 자신의 업이자 생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명창들이 있었기에 민족문화말살정책, 징용 등 일본의 각종 탄압 속에서도 위대한 유산인 우리 소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는 2012년 8월 퇴임 후 지난해 10월 1권을 출간하고 지난달 28일 마지막 8권을 완간하기까지 잠과 외출을 줄여가면서 하루 14시간씩 집필활동에 몰입했다. 원고지 1만4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전라도 특유의 맛깔나는 사투리는 물론 다양한 남도의 소리, 순 우리말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도 70여 명에 이른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정 전 교장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남도 소리를 접하며 자란 것이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소리문화가 워낙 발달된 덕에 마을 행사나 명절 등 동네 어른들 누구든 이른바 한 곡조 뽑을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 됐던 것. 그럼에도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과 자료수집이 필요했다. 그는 “더욱 깊이 있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명창들과 마을 노인들을 만나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었다”며 “보성 일대를 수 십 차례 방문해 명창들이 살았던 집도 가보고 산을 뒤집고 돌아다니며 소리꾼들이 득음했던 장소도 직접 둘러봤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철저하게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그는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실제 목포형무소 현장도 다녀오고, 징용 기피로 수감됐던 노인을 만나 밤을 새우며 형무소 생활에 대해 묻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메모하고 또 메모했다”고 덧붙였다.
“10여 년 동안 메모는 하나의 삶과 같았다”는 정 전 교장은 “집필은 주로 퇴근 후 자택에서 했지만 업무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늘 생각 한쪽에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고 출퇴근 버스에서든, 잠자기 전 머리맡에서든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메모를 했다”고 말했다.
정 전 교장의 책에는 각주가 아예 없다. 본문에 모든 설명을 세세히 녹여 설명한 것이다. 소설은 허구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때로는 역사교과서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실제 소설을 살펴보면 농악놀이라든가 화전놀이, 장마당굿 등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와 성주풀이, 진도아리랑 등 다양한 남도의 민요들이 소개된다.
반응도 뜨겁다. 얼마 전 소설을 접한 미국 워싱턴 한인협회에서는 “이주 노인들에게 고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음은 물론 어린이들을 위한 역사교육 자료로도 적합하다”며 책을 다량으로 주문했다. 모 대기업 회장도 “직원들과 공유하겠다”면서 1000질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제는 시골 마을에 내려가도 농악놀이가 무엇인지 보여줄 사람이 없어지는 등 우리 전통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정 전 교장은 “청소년들이 국악이나 민속놀이가 무엇인지 ‘우리 것’에 조금 더 관심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8권을 탈고하고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한 지금, 참 행복합니다. 제 책을 읽은 청소년들이 육자배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까닭에 오늘은 K-POP 대신 민요를 한 소절 검색해 듣는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작가가 된 것 아닐까요. 후배 선생님들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지금부터 교직 이후의 삶을 준비해보세요. 은퇴증후군, 결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