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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칼럼> 글씨를 못 쓰는 걸까? 안 쓰는 걸까?

평소 휴대폰을 잘 제출하지 않는 3명의 아이에게 경각심을 불러주기 위해 반성문을 써오게 했다. 그리고 며칠 간 말미를 주고 진심이 우러나올 수 있을 정도의 반성문을 작성해 올 것을 주문했다. 반성문 내용에 따라 휴대폰 미제출에 대한 벌점을 부여할 것이라고 했다. 만에 하나, 기간 내 써 오지 않을 시 교칙에 의거 벌점을 부여할 것이며 누적 벌점으로 학교 봉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필자의 말에 아이들은 자신감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뒤, 학교 봉사가 신경 쓰였던지 아이들은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운 반성문을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 중 한 녀석이 반성문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며 다음에는 다른 벌을 줄 수 없는지를 물었다.

“선생님, 반성문 대신 다른 벌을 주면 안 되나요?”
“요 녀석, 아직 반성을 못했구나. 반성문 한 장 더 쓰고 싶어?”

내 말에 녀석은 손사래를 치며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말에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 녀석이 힘들게 썼다는 반성문을 읽어보려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녀석이 쓴 글씨가 너무 엉망이어서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나머지 2명의 반성문을 펼쳐 봤다. 마찬가지였다. 글씨가 너무 악필이라 고3 학생이 쓴 글씨로 보기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화가 나 3명의 아이를 다시 교무실로 불렀다. 우선 본인이 직접 쓴 반성문인지를 물었다.

“이 반성문 너희가 직접 쓴 거 맞아? 혹시 동생이 대필해 준 거 아니야?”

필자의 질문에 녀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말이지 저희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글씨가 왜 이래? 마치 초등학생이 쓴 것처럼…”

그제야 아이들은 필자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하교할 때까지 국어책에 나온 단락 하나를 정해 깨끗하게 정서(正書)를 해서 오라고 주문했다. 녀석들은 불평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애써 참는 눈치였다.

아이들이 가지고 올 반성문의 글씨가 그다지 나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씨는 하루아침에 노력해 나아질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한 글을 쓸 때는 글씨를 알아볼 수 있도록 반듯하게 쓰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우리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됨에 따라 글씨를 쓸 필요성과 기회가 줄게 됐다. 그래서일까?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 그 자체가 특별한 일이 돼버렸다. 컴퓨터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과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론 정말 필요한 것조차 잊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예쁜 손 글씨로 쓴 제자의 편지를 받으면 내용과 관계없이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그리고 이메일(e-mail)보다 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아이들로부터 수기(手記)로 쓴 편지를 받아본 지도 오래된 것 같다. 교단에 선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옛날 제자의 빛바랜 편지를 서재에 보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제자가 직접 쓴 예쁜 글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 선비들이 머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 먹을 갈고 붓을 들어 글씨를 쓰곤 했듯, 입시로 스트레스 받는 고3 시기에 글씨 연습으로 마음의 수양을 하는 것은 어떨까? 글씨를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면 마음도 차분히 진정되고 생각도 정리되면서 학습효과를 더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날 저녁. 세 녀석은 내 준 과제를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고 깨끗하게 정리해 갖고 왔다. 내가 무슨 글자인지 물어보지 않을 정도로 이번 반성문은 기존에 쓴 것보다 훨씬 더 잘 쓴 글씨였다. 한 녀석이 교무실을 빠져나가며 다음과 같이 말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선생님, 앞으로 휴대폰 꼭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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