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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졸업식 날이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풍부한 감수성 때문일까. 졸업식 날이면 주체할 수 없는 쓸쓸함이 다가온다. 자꾸만 삭막해져가는 세태와 별도로 쓸쓸함은 그 동안 뭘, 어떻게 가르쳤나 하는 자괴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규 수업말고 글쓰기나 학교신문 지도로 특별한, 일명 ‘애제자’들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옛날 젊었을 적 선배 교사들은 말했다. “제자를 키우려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라”고. 그땐 그냥 듣고 흘려버렸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여제자들은 졸업하는 날 마지막 인사도 없이 가버리기 일쑤다. 또 그렇게 떠나가면 끝이다.
 
이번에도 2학년 때 글쓰기 지도를 받았던 주혜만 사진찍자며 편집실로 왔다. 환하게 웃는 주혜 옆에서 모델이 되고보니 다른 제자들은 그냥 가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3년 동안 글쓰기를 지도했던 제자 A가 그렇다. 꼭 지도한 만큼은 아니지만, A는 많은 상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다. 시집을 ‘공짜로’ 발간하게 해주었다. 신문보도와 방송출연 등 A는 갑자기 여고생 스타가 되었다. 그 기세를 몰아 대통령상인 대한민국인재상과 군산시청의 예체능 장학금까지 받게 추천해주었다. 3년간 제자가 받은 상은 자그만치 22회, 상금만해도 1천여 만 원에 달한다. 
 
“A는 장선생님 만난 게 진짜 복이네요.” 
 
교장을 비롯한 동료 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필자에게 한 말이다. 필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필자의 지도가 없었으면 A는 그렇듯 대통령상까지 받는 인재로 거듭날 수 없었다. 기꺼이 시집 출간을 맡아준 출판사 사장 역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A는 장선생님 은혜 잊지 못할 거예요. 잊어서도 안되고요”
 
어른들은 다 그렇게 아는데, A는 아직 애들이라 졸업식 날 마지막 인사도 없이 가버렸을까. 필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요즘 애들 다 그러는데, 60줄 나이에도 끓며 넘치는 감수성 때문 필자만 그런 쓸쓸함이나 자괴감이 드는 것인가. 이리저리 뇌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은 A가 졸업식 날 인사하러 올 것에 대비, 마련해둔 것도 있었다. ‘전라북도 인재상’ 공고문이었다. 내용을 보니 A에게 딱 맞았다. 추천하되 뽑힐지는 미지수지만, 5백만 원 상금이라면 소녀가장인 A에게 대학 1학기 등록금은 될 거금이었다. 유독 상금 많이 걸린 공모전 위주로 응모하여 수상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컸다.
 
하긴 A만 그런 건 아니다. B는 2년간 글쓰기를 비롯 학생기자로 지도받은 제자이다. 대학도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했다. 졸업식 전날까지 편집실에서 일한 걸 마지막 인사로 안 것일까. B 역시 졸업식 날 “그 동안 미숙한 저를 잘 지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위 마지막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가버렸다.
 
문득 옛날 일이 하나 떠오른다. 1980년대말, 필자는 구례여자고등학교 교사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졸업식 날 현진이 찾아왔다. 도서반 학생이었다. 지금처럼 남다른 열정과 봉사정신으로 글쓰기 지도한 제자가 아니었다. 당연히 뜻밖이었고, 너무 반갑기도 했다. 제자는, 나중 열어보니 스킨로션 들어있는 선물상자를 내밀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오히려 죄송한 건 필자였다. 젊었을 때 여학생들에게 인기 짱이었던 필자는 그만 편애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현진이 속한 반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한 것이었다. 해명을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현진이란 이름이 나왔다. 현진은 얼굴이 새빨개져 어찌 할 줄을 몰랐다.
 
25년 전 그런 현진이마저 졸업식 날 후로 어떤 연락도 없었다. 졸업식 날 오지 않았어도 될 현진이기에 내내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졸업식 날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간 애제자들이 어디 한둘일까만, 이번만큼은 쓸쓸함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다. 교직 31년 만에 이런 글을 처음으로 쓰는 이유이다. 
 
그래, 필자는 애써 제자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려 한다. 무려 3년 동안 A에게 공들이고 노심초사하며 희비를 같이 했던 원로교사로서의 A에 대한 편애가 너무 무안해서다. ‘인간의 도리’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이 ‘뻘짓’이 너무 쓸쓸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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