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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나는 누구인가

강의를 하러 가면 강사 소개를 한다. 그러면서 업무 담당자가 나의 이력을 읽는다. 출신 대학부터 근무하는 학교, 직책, 그리고 출간한 저서를 열거한다. 사적으로 앞면이 있는 경우는 강의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인연까지 들추며 연수생들에게 박수를 유도한다. 그리고 꼭 붙이는 말이 훌륭한 강사라고 칭송한다. 이때 일부 청중은 소개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고 환호의 박수를 보내준다. 그런데 그 순간은 민망하기 짝이 없다. ‘훌륭하다’라는 형용사를 내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학력과 프로필은 부끄럽다. 남과 비교하면 더 보잘 것이 없다. 더욱 내가 가진 경력이라는 것이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이룬 것도 아니다. 교직이라는 조직 사회에서 관계하면서 얻은 것이다. 강의 내용도 내 것이 아니다. 그저 학교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한 사례를 안내할 뿐이다. 수업하면서 어려웠던 점, 반성해야 할 점을 이야기한다. 수업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도 아니고, 나만의 수업 기술도 알려주지 못한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경력을 밝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남과 만날 때는 이름을 알려주워야 한다. 나는 싫지만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다. 문제는 그것이 이해의 수단이 되지 않고 평가의 잣대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이러한 덫에 광범위하게 걸려 있다. 무조건 일류 대학에 가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 그렇다. 멀리는 명품을 좋아하고 외모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도 그렇다.

물론 나란 위인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맺고 있는 관계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래야만 나란 존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개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을 몇 줄의 언어 표현으로 동기화시켜 버리고 싶지 않다.

나의 모습을 출신 학교로, 몇 권의 저서로, 직장에서의 직책으로만 규정하는 데는 억울한 면이 많다. 오히려 이것은 내 삶에서 가을걷이 끝나고 밭에 떨어진 곡식알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의 뜨거운 내면이 없다. 도드라진 특성을 나타내지 못하고 남이 이해하기 쉬운 겉모습만 드러낸다. 이런 것을 가지고 내 평생이 남긴 열매라고 치기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나는 오히려 프로필을 통해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 지금까지 내 능력을 믿고 헤쳐 온 인내와 절제 그리고 부지런함 등이다. 시련이 짓누를 때 굴복하지 않고 일어섰다. 열병 속에 고생할 때도 나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마지막 절망처럼 느꼈던 겨울을 보내고도 봄의 싹을 밀어 올렸다. 나태와 안일을 스스로 거부하고 눈물겹도록 달려왔다. 이것을 정작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주변에서 보면 열등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가 구축해 놓은 경쟁의 대열에 서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목표를 세우는 꼴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값진 의상이나 장식품에만 의존하는 거와 같다. 모두 부질없는 낭비일 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러다보니 정작 중요한 가치들과 대면하지 못하고 황량한 거리에서 내면의 아픔을 삭이고 있다.

우리 삶에서 영원한 목표는 결국 나를 찾는 것이 아닐까.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도 나에 대한 앎이다. 나에 대한 앎이란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혜이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간단히 말했지만,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의 능력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겉모습으로 표현하는 나를 버리고 내면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고민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따스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고 싶다.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도덕과 법을 지키는 맥락과 같은 말이다. 인격적이라는 말도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내가 수필을 쓴다는 이유로 가끔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묻는 의도는 글을 쓰는 기교에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다른 곳을 지향한다. 글을 잘 쓰려면 삶을 제대로 영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삶과 글이 일치할 때 글이 생명력을 얻는다.

나이 먹어 가면서 요즘 격조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삶의 지향도 이렇게 하려고 한다. 생각에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얼굴이 너그러워진다고 한다. 나이 먹어 가면서 삶의 방향을 부드럽고 격조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한다. 몇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삶이 아닌 곰삭은 부드러움으로 내 삶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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