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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천국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었는가?'이다."(인디언 속담 중에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소설을 진득하게 읽어내지 못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독학을 하던 때 글의 핵심과 주제를 얼른 건져내는 기능적 책 읽기 습관 때문입니다. 주경야독하던 시절, 검정고시와 공무원 시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으며 시간에 쫓기고 다급했기에 두툼한 소설을 낭만적으로 읽지 못한 서글픈 청년기를 보낸 탓입니다.

자기계발서나 철학, 교육심리 분야 책을 편식하는 편이고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과 시, 에세이 중심의 책 읽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이런 제 경험을 비추어 보며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행복한 독서를 못하거나 안 하는 요인이 구조적인 입시 환경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작가의 긴 호흡을 따라가며 몇 시간, 며칠을 작가가 그려놓은 지도를 밟아 여행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을 누리지 못한 채 현실적인 독서를 숙제하듯 해야 했던 저처럼, 입시에서 고득점을 얻는 책 읽기나 논술에 집착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즐겁고 행복한 책 읽기의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에 끝나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의 호수에 나룻배를 대놓고 배고픔도 잊은 채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기쁨을 맛보는 경험이 쌓여야 책을 인생의 도반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 반드시 챙겨 먹어야 할 마시멜로 같은 것입니다.
 
저는 학급을 맡으면 가장 먼저 힘쓰고 가장 오래 지속하는 교육방침이 철저한 독서지도입니다. 제가 갖지 못한 유년 독서의 아픔을 우리 반 아이들이 겪지 않도록, 독서의 기쁨을 깨닫게 하도록 집중합니다. 열 마디의 훈화보다 한 권의 아름다운 동화가 아이들의 가슴을 열게 하고 변화의 씨앗을 심게 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치게 할 때도,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데도 책은 힘을 발휘합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자존감이 낮아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싸움닭처럼 소리 지르고 기다리지 못하던 우리 반 아이가 지금은 시냇물처럼 조용히 흐르게 된 것은 동화의 힘이 컸습니다.

아침독서 시간과 점심 후 독서 시간에 다 읽은 책은 제 앞에 나와서 조잘조잘 책의 내용과 자신의 생각을 시도 때도 없이 쫑알대는 우리 1학년이랍니다. 쉬는 시간이면 서로 읽은 책 이야기 하겠다며 제 곁에서 제비 새끼처럼 귀여운 입으로 총총한 눈동자로 읽은 책들을 들고 와서 자랑하는 모습!

이런 기쁨을 어디 가서 얻을 수 있을까  정말 선생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림책의 아름다움과 철학적 깊이에 놀라곤 합니다. 한 줄 문장으로 표현된 글에 화면 가득한 화가들의 상상력과 색채감, 따스한 시선들에 매혹된 아이들은 좋아하는 그림책은 반복해서 읽으며 행복해 합니다.
 
활자만이 독서가 아님을 아이들은 벌써 알고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 속의 주인공이 되고 그림이 된 듯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오갑니다. <퐁퐁이와 툴툴이>를 읽으며 그동안 자기의 모습이 툴툴이였는데 이제는 퐁퐁이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 했다는 아이는 소리 지르며 울다가도 이내 눈물을 거둘 때, 저는 얼른 우리 퐁퐁이 눈에 샘물이 흘러 더 예뻐졌다며 칭찬해 줍니다.

아직 어른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감성의 문은 닫혀 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의 눈이 밝은 아이는 순간순간 자신과 싸워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답습니다. 그 큰 눈에 담긴 커다란 슬픔을 독서하는 기쁨으로 가득 채우길 말없이 빌곤 합니다.

선생님이 자기를 칭찬해 주니 학교 다니는 게 행복하다는 아이의 말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지난 1년, 저를 가장 아프게 한 아이가 가장 큰 기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고통과 상처의 크기만큼 그 열매도 달달한 11월 마지막 날. 저는 이제 12월의 문을 더 힘차게 열겠습니다. 인디언 속담처럼 선생으로 살아온 교실에서 기쁨을 얻었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선생으로 살고 있으니, 천국의 문 앞에서 대기번호를 기다려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이미 천국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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