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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최근 들어 제자들이 찾는 일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학생이 되면서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면서. 동기 모임에 초대도 하고. 그 아이들 이야기들을 해 주려고 기록을 뒤지다 발견한 오래 전 교단일기를 소개합니다. 마음은 늘 그 자리에 있음을!)

14년 전 교단일기

겨울 방학을 하던 날 아침. 때마침 눈이 내려서 그렇지 않아도 설레던 아이들이 더 더욱 방방 뛰던 교실. 방학 동안의 그리움을 잠시 달래 보려고 써 준 내 원고도 뒷전인 채 아이들은 집에 언제 가느냐고 성화였다. 한 아이씩 껴안아 주면서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헤어지는 그리움을 나눠보고 싶은데 아이들은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더 방학이 더 설레는 것은 아이들보다 나였는지도 모른다. 방학을 시작함과 동시에 직원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백암온천을 거쳐 성류굴,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며 정동진까지 다녀올 계획이었으니, 수학 여행 가던 날 설레던 우리 반 아이들처럼 나도 붕 떠 있었다. 10년 만에 처음 배운 유행가 한 곡에 테이프까지 사들고 떠난 여행이니 나이가 들면 철이 더 없어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장거리 여행으로 버스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인데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여행 그 자체를 즐기는 나의 성품 탓이리라. 뿌리박고 살아온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잠시 뒤로하고 일로부터도 손을 뗀 채 나만의 사색으로 온전히 편안해지는 여행이 주는 속성이 좋은 것이다. 하루 동안의 허가 난 출가 시간은 열심히 살아온 1년을 보상하는데 결코 부족한 시간이 아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나로부터 떠나볼 수 있는 찰나이지만 정신이 맑아지는 데는 그만인 여행! 함께 떠나는 직원들도 어느 때보다 더 친밀해지고 편안해져서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 자신이 더 넓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 모두가 한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라는 생각, 지구라는 몸통에 매달린 각각의 지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다정해 보이는 것이다.

이번 겨울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이라면 경북 영덕에 있는 경보화석박물관이었다.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만나는 겨울 바다에 유유히 노닐던 갈매기도 나처럼 겨울 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고 파도치며 부딪치던 물보라의 언덕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어느 대양에서 밀려와 한 순간 부딪치고 떠나가는 물살에 밀려온 모래톱이 이루던 겨울 바다의 차가움이 낯설지 않고 다정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화석을 보는 감회는 이국땅에 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최소한 1만 년 이상에서부터 수 억 년 전에 만들어진 진기한 화석들은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거리가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특수한 환경에서만 화석이 된다는 증거들을 보며 숙연해졌다. 갑자기 그 화석들은 내 존재가 그냥 왔다가는 삶이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를 내게 던지는 것만 같아서 화석 하나하나를 대할 때마다 튀어나와서 말을 걸 것만 같았다.

과거 지구상에 존재한 수많은 생물 중에 극히 일부만이 특수한 환경을 만나 화석으로 보존되어 그 순간에 나와 만나고 있었으니, 그 인연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화석을 비롯해 보석으로 거듭난 돌들이 찬란한 빛을 내면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넌 어디서 무엇을 만나 어떤 화석을 지상에 남겨 두고 갈 것이냐?'고

그것은 분명 화두였다. 지상에 남기고 가야할 화석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남기고 갈 것인지…….아름다운 보석까지는 못되더라도 추한 흔적만은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숙제는 해야 한다는 답변의 고리를 붙잡고 지낸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죽어서도 말을 하고 나를 가르치는 화석 친구들을 보며 지구상에 먼저 살다간 사람만이 위대한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만이 온 세계를 움직여 온 것처럼 만들어가고 있는 인류의 역사 진술이 오만이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조그맣고 가녀린 화석 하나가 지질의 연대를 측정하게 하고 지하자원을 탐사하는 지시자 역할을 해낸다니 역사를 만들고 꾸려 나가는 것은 온 생명체가 함께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렬한 화산 폭발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아픔의 시각이 결코 헛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아 수억 년의 역사 뒤에 빛을 발하게 되니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서 내가 뿌리고 살아온 말의 씨, 내가 행해 온 행동의 씨앗들이 어디서 싹을 틔워 수많은 세월을 뒤에 결과로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 앞에 다시금 숙연해졌다.

죽어서도 죽지 아니하는 삶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미물에도 다 똑같이 존재하는 평등한 삶의 진리! 45억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지구의 역사 속에 존재하고 사라져간 생명체들의 일부를 화석으로나마 보면서 의미 없는 삶을 면하려면 늘 특수한 환경을 스스로라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깨어 있음의 자각까지 들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사는 화석의 의미는 이번 겨울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를 거쳐 간 그 많은 제자들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순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속에 어떤 식으로든 각인 되어 있을 나의 화석은 어떤 모습일지 부끄러움이 엄습해 왔다. 살아온 날들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 보게 된 이번 겨울 여행으로 인해 올 겨울 방학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성실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 먼 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 것도 가슴속에 새겨놓은 화석의 의미가 나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학이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도 개구쟁이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내일은 아이들에게 e-mail로 여행의 소감을 전해 주어야겠다.
(2001. 12. 21. 구례중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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