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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이팝나무 꽃을 보며

계절은 봄인가 싶더니 입하를 지나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다. 짙어지는 연둣빛 신록 사이로 이팝나무의 하얀 꽃과 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만개하고 있다. 오월은 감사와 은혜 행복의 마음이 넘치는 달이다. 항상 맞이하는 달이지만 새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쁜 일상 속에 영혼의 울림을 들어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오월 하면 무엇보다도 어린이, 부모님, 스승이 먼저 떠오른다. 항상 바쁘다고 길 막힌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던 장모님을 뵈러 갔다. 헤아려 보니 뇌졸중으로 요양병원에 계신지 어느덧 두 해가 되어간다. 한 다리 건너 천 리일까? 같은 자식이라도 딸과 사위 마음은 또 다른 것이다.

차창 밖 초록의 물결을 보며 도착한 요양병원은 도심 속의 섬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햇볕 한줄기, 파란 하늘, 구름 한 조각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병실. 고만고만한 사정으로 누워계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마음 깊은 웅덩이에 돌팔매질이 시작된다. 석 달 만에 장모님을 보자 아내는 “우리 엄마!” 보듬고 비비며 눈물부터 흘린다. 마비된 오른쪽을 대신하여 왼쪽 눈을 크게 껌벅거리며 전해지는 정은 반쪽이나 다름없다. 산으로 들로 약초 캐며 시장 좌판을 벌인 강단진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장딴지를 만져도 근육 한 줄 잡히지 않는 껍데기만 남았다. 그래도 처음 병원에 왔을 땐 집에 갈 수 있으리란 희망의 끈으로 버티셨지만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에 의욕을 잃을 퀭한 눈빛은 너무나 서글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장모님에게도 진달래 피면 꽃을 따 쌉싸름한 맛을 보며 화전을 부쳐 먹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청춘은 햇빛을 보지 못해 반투명해진 피부에 검버섯으로 암각화를 새기고 있다.

가슴이 울컥하여 병실을 나와 도로변에 선다. 이곳 도심의 가로수도 이팝나무이다. 새하얀 꽃을 매단 이팝나무는 쌀나무라고도 한다. 보릿고개 시절 이밥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이팝나무라 하였을까? 유년시절 제일 먹고 싶은 밥이 하얀 쌀밥이었다. 대부분 농촌 가정이 그러하였겠지만 언제나 쌀이 부족한 우리 집은 보리쌀을 삶아 두었다가 끼니때가 되면 가마솥에 먼저 두르고, 그 가운데에 달걀노른자처럼 쌀 한 줌을 앉히고 불을 지핀다. 밥솥의 뜸이 돌고 나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아버지 밥그릇과 내 밥그릇에 쌀밥을 담는다. 그러고 나서 주걱으로 모두 섞어 버린다. 밥 먹을 때 어머니와 누나의 양푼이 밥그릇엔 쌀알을 보기란 가물에 콩 나듯 하였다. 그래도 어쩌다 내 밥에 보리쌀이 보이면 보리밥알 들어갔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쌀밥을 조금 남기고 상을 물리셨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야 이 너무 자석아! 니도 장가가서 어매아배가 돼 봐야 그 마음 알기다.” 그런데 그 뜻을 이제 알게 되었다. 옛말에 마른 내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보기 좋은 일이라 했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면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아이를 키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생선 조림이나 국을 끓이면 머리와 꼬리는 아내와 내 차지가 되었고 꽃게를 삶아도 넓적다리는 아이들 차지였다. 그래도 모자라는 듯 하면 더 주고 싶고 아깝지가 않았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하지만 자식은 잘 느끼지 못한다. 모두 절로 나서 절로 자란 것처럼 생각한다. 늙고 힘없는 부모님에게 올리는 사랑과 효는 베풀어 주신 정성과 사랑에 비하면 반의반도 못 미친다.

이팝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다시 병실로 돌아간다. 아직도 아내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다. 손발과 얼굴을 닦아드리고 과일도 드시기 좋게 만들어 한 입 두 입 권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효자 효녀가 따로 있나 가까이서 자주 찾아뵙는 게 제일인데, 아들 며느리보다 더 정감 있게 살갑게 대하는 것은 딸이 아닌가 한다.

장모님은 병원 신세를 지기 전 기념일이라고 한 두어 푼 용돈을 보내 드리면 전부 모아 더 보태 손자 손녀에게 되돌려 주는 그런 사랑을 주셨다. 그러나 젊은 자식과 손주들은 여전히 자신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영악한 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얼마 있지 않아 어버이날이다. 벌써 꽃집이며 장날 좌판엔 카네이션이 진열되기 시작한다. 굽은 허리와 뒤뚱거림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병원 앞에 줄지어 앉은 어르신의 모습이 선하다. 꽃 한 송이가 무슨 대수랴! 그래도 어르신들은 모이면 자식 자랑밖에 없다. 절대 자식 흉보는 이야기는 안 하신다. 이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다.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 길어지는 하루해를 보며 또 마늘쫑 뽑기에 허리가 휠 남해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이 봄 햇볕 좋은 날. 병상에 계신 장모님도 한 번 일어나 이팝나무 꽃 참 소담스럽게 피었구나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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