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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간소화 파동의 교훈

‘NEA 양복감’이란 것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미국교육협회(NEA)에서 보내온 선물 제1차 분 양복감 2,400명 분이 부산항에 도착하여 1953년 7월 8일 부산 소재 영선국민학교에서 내외 귀빈 다수 및 전국 교육감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대한교육연합회 주최로 성대한 접수식을 거행하였다. 대한교육연합회는 교사 1인당 양복감 6마씩을 보내면서 “3마는 양복의 재료로 나머지 3마는 경비로 충당할 것” 그리고 “보내는 이들과 받는 이들 사이에 맺어지는 우의가 더욱 돈독하여 지기를 바라는” 당부의 뜻도 함께 전했다. 부산에서 마지막으로 간행된 <새교육> 제5권 3호(1953년 7·8월호)는 이 소식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교사들의 의복도 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픈 시대였다.

전쟁의 흔적 지우기 “교육 복구 시작”
교육에 남긴 전쟁의 흔적은 매우 컸다. 제3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장이욱박사의 표현대로 이 시기는 교육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비상한 때”였다.(<새교육> 제5권 2호, 1953년 5·6월호) 이 비상한 시기의 한국교육에 대해서는 1952년 12월 1일자로 발표된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과 유네스코가 함께 파견한 교육계획사절단의 ‘한국의 교육상황 예비조사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새교육> 제5권 3호에 소개된 이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여러 곳에서는 초등교육조차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야외에서, 나무 밑에서, 산기슭에서 수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빈곤 때문에 학습에 필요한 종이, 연필, 또는 크레용이 없는 아동이 많았으며 참고 재료나 도서관 책은 전무하였다.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교육재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이나 교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교사 1인당 평균 학생 수는 77명이었으나 학급 당 학생이 많게는 130명에 이르렀다. 교육법에서 규정한 학급당 최고 60명을 두 배 이상 초과하는 셈이었다. 학급당 50명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교육환경은 최악이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계획사절단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도 짧은 시간 내에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감수성과 적성을 더 많이 보여준 국민이 또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교육의 “향상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성은 눈물겨운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특히 한국의 다수 교육자들이 당시 지니고 있던 희망에 주목하였다.

피란지 생활을 하던 대한교육연합회는 제5권 제3호에 ‘환도의 말씀’이라는 공고문을 게재하여 “모진 눈비를 맞아가면서 부산으로 내려온지” 3년 만인 1953년 8월 22일자로 당시 서울 삼청동 산2번지에 있던 본 회관으로의 복귀를 알렸다. 전후 교육 복구가 시작된 것이다.

한글, 소리나는 대로 표기… 교육계 일대 혼란
다수 교육자들이 교육여건을 개선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매진하던 당시 교육계를 일대 혼란에 빠뜨린 파동의 주인공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한글간소화 파동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정부수립 초기인 1949년 10월 9일 한글날 담화를 통해 당시 한글을 “괴상하게 만들어 놓아 퇴보된 글”이라고 규정하고 “모든 언론계와 문화계에서 특별히 주의하여 맞춤법을 속히 개정하기를 바라는 바”라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1950년 5월 3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글전용 원칙과 함께 한글철자법의 개정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잇다’와 ‘있다’가 무엇이 다른가? 문화를 진보시키려면 하루바삐 고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퇴보할 것이다. 한인들이 완고해서 퇴보하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식으로 고쳐야 할 것이니, 만일 민간에서 고집을 하고 개량을 안 하면 정부만이라도 사용하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내가 말하는 식”은 그가 개화기부터 읽어오던 한글판 성경대로 우리 글을 소리나는 대로 쉽게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전쟁의 발발로 인해 대통령의 주장은 한 동안 실천되지 못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3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또 다시 담화문을 통해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 달 안에 교정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교육계, 문화계, 언론계, 정치계를 2년 간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던 이른바 한글간소화 파동의 출발을 알리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담화 1개월 후인 4월 27일에 국무총리는 ‘현행 철자법의 폐지와 구식 기음법의 사용’이라는 국무총리 훈령 8호를 발표하였다.


해방 이후 한글전용 문제나 한글맞춤법 개선 문제는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유엔 한국재건단 보고서에서도 한글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국민학교 교과서는 국가 시책에 따라 한글전용이었으며 국민학생들은 한자를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밖의 신문이나 일반 서적은 국한문 혼용이었기 때문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이를 읽는데 곤란을 겪는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국민학교 교육에서 한자를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폐지할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제거하던지 아니면 학교와 학교 이외의 분야에서 일률적으로 한자를 제거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국어학계 내부에서도 당시 한글 맞춤법이 지나치게 복잡하여 배우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다수 있었고, 이에 따라 개선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존재하고 있었다.

대통령 담화에도 반대 여론 압도적
이런 여건에서 발표된 대통령의 담화와 국무총리 훈령임에도 불구하고 찬성보다는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현행 한글 맞춤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 대신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개화기의 맞춤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지닌 불합리성이었다. 둘째는, 불과 3개월 안에 고치자는 주장의 성급함이었다. 한 나라의 국어를 전면 개선하는데 3개월이라는 기간을 못 박은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요구였다. 권력자의 오만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였다.

대통령의 이런 주장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조직적으로 비판을 제기한 것은 당시 대한민국 7만 교육자를 대표하고 있던 대한교육연합회였다. 대한교육연합회는 1953년 5월 30일에 대의원회를 개최하고 ‘한글철자법 폐지 반대에 관한 건의안’을 대통령, 국무총리, 문교부장관, 그리고 국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일간 신문에 성명서를 게재하였다. 이 성명서는 한글맞춤법이 “학자들의 다년간 혈투의 결정”이라는 점, 구식 철자법으로의 회귀는 국어문화의 혼란, 학도의 지식 상 혼란, 그리고 민족문화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기에 반대한다는 점을 밝혔다. 아울러 철자법 수정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신중한 연구를 거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파동은 문교부 편수국장이었던 한글학자 최현배와 김법린 문교부장관의 사임을 가져왔고, 한글학회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국내 학계와 문화계의 비판을 촉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문교부장관에 임명된 이선근 주도로 정부의 한글간소화안이 1954년 7월 3일에 정식으로 발표되었고, 10일 후인 7월 13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간소화 실천의지를 담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다는 이른바 표음원칙에 기초한 이 간소화안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학계뿐 아니라 일반국민들로부터도 제기되었다. 국민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정부 주도로 조직한 ‘국어심의위원회’에서도 간소화안 폐기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의 의지로 시작되고 추진된 한글간소화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주도하였던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대한교육연합회였다. 앞서 발표한 성명서 이후에도 <새교육>지는 1953년과 1954년에 발간된 거의 매호를 통해 ‘철자법 문제에 대한 시비’(장지영, 제5권 4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간이성’(최현배, 제6권 1호), ‘한글 간이화 문제 논설 특집’(김윤경, 정경해, 최현배, 제6권 2호), ‘한글파동 소사’(S 생, 제6권 4호) 등을 게재하여 그 부당성을 학술적으로 논함으로써 이 국민적 관심사에 관한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계속된 비판 속에 한글간소화 정책은 1년간 표류하였고, 결국 1955년 9월 19일 이승만대통령의 담화 발표로 전격 철회되었다. 담화문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문을 어렵게 복잡하게 쓰는 것이 벌써 습관이 되어서 고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모양이며, 또한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좋은 점도 있기에 그럴 것이므로, 지금 여러 가지 바쁜 때에 이것을 가지고 이 이상 더 문제 삼지 않겠고,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붙이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총명이 특수한 만치 폐단이 되거나 불편한 장애를 주게 될 때에는 다 깨닫고 다시 교정할 줄 믿는 바이므로 내 자신 여기 대해서는 다시 이론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서울신문, 1955. 9. 20)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국가정책이라면 그것이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비판을 주도하였던 대한교육연합회, 전문가와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따라 자신의 소신을 굽혔던 대통령의 모습에서 민주주의로 향해 나아가던 60년 전 대한민국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총명이 특수”하다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던 대통령의 마지막 담화문이 주는 울림이 새롭다. 한글간소화 파동, 교육정책의 전문성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지니는 가치, 그리고 교육정책 결정 과정의 민주성이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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