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4 (월)

  • -동두천 9.8℃
  • -강릉 10.8℃
  • 구름많음서울 12.4℃
  • 맑음대전 13.6℃
  • 구름조금대구 13.9℃
  • 구름많음울산 15.0℃
  • 흐림광주 14.2℃
  • 구름많음부산 16.1℃
  • -고창 15.2℃
  • 흐림제주 18.6℃
  • -강화 11.4℃
  • -보은 12.4℃
  • -금산 12.1℃
  • -강진군 17.1℃
  • -경주시 14.0℃
  • -거제 17.0℃

시험 끝난 불변의 진리, 교육자치제 폐지운동
:矯角殺牛의 망동

교육행정을 일반행정으로부터 분리하여 그 독립성을 인정하는 제도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얼마나 오래전부터 인류는 사람을 다루는 교육이 물질을 다루는 일반행정과는 다르다는 것, 따라서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것, 정치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학관(學官) 제도’가 그 시작이며, 근대 교육자치제가 도입된 것은 1948년 8월 12일 미군정의 정부 이양 직전에 공포된 ‘교육구 설치에 관한 법령’이 그 출발점이었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자치제는 다시 시험대에 올라있다. 교육자치제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교육자치의 정신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리 조상들이 ‘사람을 다루는 교육과 물질을 다루는 일반행정은 서로 다르며, 이로 인해 교육에는 전문성이 요구되고, 정치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한 것은 고려시대였다. 고려사에 자주 등장하는 ‘학관(學官)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각 지방의 수령이었던 목사나 현령 등과는 별도로 ‘학관’이 임명되어 지역 교육을 담당하였다. 수령들은 자기들의 권한 밖에 존재하는 교육 권력의 상징인 ‘학관’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학관 폐지 상소를 올렸고, 이를 둘러싸고 군왕과 관리들 사이에 논쟁이 이어졌다. 이 논쟁에서 늘 학관 제도 존속 편에 섰던 것은 군왕이었다.

‘교육은 나라 존속의 근간으로서 특별하므로 일반 관리들의 권한 아래 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일반행정 영역에 속하는 모든 업무는 시대적 상황이나 재정적 여건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지만 교육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 중심’ 논리 앞에 관료들은 주장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교육에 대한 이런 오랜 소신은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스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근대 교육 속에서 발견되는 교사들의 특별한 소명의식에도 전승되었다. 이처럼 근대 교육의 핵심 이념인 교육자치는 외견상 서구적 제도를 따르고 있을지 몰라도 정신이나 뿌리까지 남의 것은 아니었다.

교육법의 ‘2대 승리’, 관리의 민주주의화와 교육자치제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일반행정으로부터 교육행정을 분리, 독립시키는 제도를 교육자치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근대 교육자치제가 도입된 것은 언제일까? 법적으로는 1948년 8월 12일 미군정의 정부 이양 직전에 공포된 ‘교육구 설치에 관한 법령’이 그 출발점이었고, 1949년 12월에 공포된 교육법에 교육자치제가 반영되었다. 미군정 하에서 교육부장을 지냈던 오천석은 교육법의 ‘2대 승리’로 교육 관리의 민주주의화와 교육자치제 채택을 들었다.

과거에는 일반 국민이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관해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고,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맹종적(盲從的)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온다’고 뚜렷이 선언되고, 교육법도 이 정신에 보조를 맞춰 자치제의 핵심인 교육구 제정과 교육위원회의 창설을 규정하였다(오천석, 새교육법을 비판함, 제3권 제1·2호, 1950년 1·2월호).

전쟁 발발로 시행이 지연되었던 교육자치제는 전쟁 중이던 1952년 5월, 군 단위에 교육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비로소 시행되었다. 전후 복구가 미진하였던 서울특별시는 교육자치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위원 선출이 간접 선거였다는 등 많은 한계는 있었지만 국회의원 윤택중의 표현대로 ‘민주교육의 첫걸음’이었다(윤택중, 교육구 설치와 교육위원회에 대한 소고, 1952년 봄호, 제4권 1호). <새교육>은 아래와 같은 사고를 통해 교육자치제의 성공적 정착을 통해 ‘교육독립의 성업을 완수하자’고 호소하였다(새교육, 제4권 1호).

교육독립의 획기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교육구와 교육위원회가 실현되었다. 위원은 시·읍·면 의원 중에서 선거되는 것이요, 교육감은 교육공무원 중에서 선택되는 것이므로 적재적소로 교육자나 교육에 이해가 깊고 고매한 식견과 강력한 실행력이 있는 분이 나와서 이 제도를 잘 운용하여 교육독립의 성업을 완수하여야 되겠으니 전 교육자와 각급 교육회는 교육사활을 결정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지방선거에 유위유능(有爲有能)한 인재를 선거하도록 만전의 계획을 수립하여 최선진미(最善盡美)의 활동을 전개하시기를 거듭 강조합니다.

회보 발간 등으로 대한교육연합회(이하 대한교련)는 계몽에 전력을 기울였다. 각 시·도에 강사를 파견하여 홍보에 최선을 다한 결과 90% 이상 대한교련이 기대하던 교육위원과 교육감이 선출되었다. 물론 극소수이지만 교육에 전문적인 소양과 이해 없이 일종의 감투로 생각하고 덤벼든 경우도 있어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주기용, 교육감 자격에 대한 일고, 제4권 2호, 1952년). 6월 5일에 치러진 간접 선거에 따라 교육감이 8월 8일과 11일에 발령되었다. 대부분 교육 경력이 풍부한 교장이나 장학사 출신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