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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이 새교육을 비판하다

‘구교육’, 혹은 ‘헌교육’에 대한 ‘새교육의 반란’은 미군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3년간 지속되었던 ‘새교육의 반란’을 진압하고 ‘구교육의 복원’을 꾀하려 했던 최초의 인물은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문교부 장관에 임명된 안호상이었다. 그는 백과사전에서 민족사학자, 철학자, 대종교인, 정치가, 그리고 파시스트라는 다양한 명칭을 부여할 만큼 경력이 화려했다.

그는 1920년대 초에 일본에서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을 거쳐 독일에서 유학하였다. 독일 예나대학교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 1929년이었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일본 교토제국대학교, 독일 훔볼트대학교, 경성제국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경력을 쌓은 후 1933년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광수의 소개로 시인 모윤숙과 결혼하였으나 후일 헤어졌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해방과 함께 민족주의 계열의 다양한 학술단체, 문화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자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었다.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의 일민주의
안호상은 단군을 숭상하는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의 열렬한 신도였다.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하나의 백성’이란 의미의 ‘일민주의’를 이론화하여 제시함으로써 이승만이 외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정치 구호를 학술적으로 공고히했으며, 교육을 정치적 도구로 삼기 시작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안호상은 민주주의 출발점이 서양이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파격적 주장을 함으로써 새교육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정부 수립 직후 행한 한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신라식 민주주의요, 신라에서 발달한 것이 구라파로 넘어가 이것이 또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신라의 화랑도 이야기에 나오는 화백회의를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해석한 것이 분명하다. 안호상을 따라 많은 교육자가 새교육에 대한 비판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서울청계공립국민학교장 최윤수는 새교육의 정신적 지주인 듀이가 한국인이 아니고 미국인이기에 개인주의에 기초한 교육이론을 발전시켰고, 우리나라는 미군정 3년 동안 이를 학습하였는데 이는 흡사 ‘유아에게 철학을 강의하는 꼴’이라고 비유하였다. 결국 새교육은 엄청난 피해를 이 강산, 이 민족에게 입혔다는 점에서 이것은 ‘민주주의 교육’이 아니고 ‘미친주의 교육’이었다고 평가절하 했다.(<새교육> 2권 2·3호)

민족주의 진영의 새교육 비판은 미국 유학파 출신 백낙준 2대 문교부 장관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잠시 주춤했던 새교육 운동은 이른바 커리큘럼 개조운동의 형태로 전쟁 중이던 1951년에 부활한다. 이후 1955년 8월 1일 제1차 국가교육과정의 공포에 이르기까지 현장 교사 중심의 커리큘럼 개조운동은 아동중심, 생활중심, 그리고 경험중심 철학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봉건적 색채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든 노력을 기울인다(이 시기 커리큘럼 개조운동의 교육사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된다).

국가교육과정 공포가 주는 의미
1955년 8월 1일의 국가교육과정 공포는 한국 교육의 발전 과정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독점의 제도화 선언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후 국가권력에 밀착된 지식인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현장교사들은 국가의 교육 아젠다(agenda)를 맥없이 실천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교육자치제, 학원의 자유 등 1950년대에 추진되고 있던 교육의 민주화를 위한 현장의 다양한 시도들이 하나둘씩 소멸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새교육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새교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비판, 그리고 새교육 이후의 미래 교육에 대한 탐색을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잡지 <새교육>이었다. 그 시작은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진보주의 교육의 퇴조에 대한 관심과 소개였다. <새교육>은 1957년 6월호에서 ‘3R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에 게재되었던 기사 ‘Back to the 3Rs : Change in the Schools’를 번역 소개하였다. 이는 진보주의 교육의 퇴조를 가져온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 4개월 전이었다. 이 기사는 미국의 공립학교들이 진보적 관념에서 벗어나 기초적인 교과 과정으로 돌아가려는 경향, 그리고 훈육을 강조하는 경향을 조사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학력에 대한 관심의 부활, 숙련된 과학자와 기술자 부족에 대한 국가 차원의 우려, 그리고 학생들의 풍기문란에 대한 학부모들의 걱정이 점차 확대되면서 읽기·쓰기·셈하기 등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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