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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진화(進化)는 ‘피카츄’만의 특권이 아니다. 애플사의 IOS 10.3, 민주주의 3.0, 인더스트리 4.0(4차 산업혁명)에서 볼 수 있듯이 소프트웨어는 물론이고 정치도, 산업 체계도 진화한다. 공연이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연극이나 뮤지컬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캔버스에 고정되지 않고 무대 위에 살아 움직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기체에 가까운 성질을 지닌다. 이런 까닭에 그 진화는 더욱 자유롭고 변화무쌍하다. ‘공연 2.0’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진화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공연에서의 진화는 흔히 재연(再演)이라고 하는 두 번째 시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연이 처음 관객에게 공개되는 초연이 끝나면, 제작진은 관객과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반영해 재창작 작업에 나선다. 대사 몇 마디 정도가 수정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큰 뼈대만 남겨두고 장면부터 노래를 모두 교체하는 ‘대공사’가 이뤄지기도 한다. 

◆친절함에 방점 찍고 돌아온 <더데빌>=얼마 전 막을 올린 뮤지컬 <더 데빌>이 대표적인 경우다. 2014년 초연된 이 뮤지컬은 넘버(뮤지컬에서의 노래)의 70%를 수정하고, 3인극을 4인극으로 변경하는 대대적인 수선(?)을 거쳤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선과 악이라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유혹당하는 인간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티프가 된 원작도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건만, 연출가 이지나는 초연에서 설명적인 대사는 최대한 배제하고,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듯 상징과 은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러한 철학적인 은유, 파격적인 장면 연출 덕분에 작품은 단숨에 화제작으로 떠올랐지만, 동시에 ‘난해하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 또한 빗발쳤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 3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재공연은 무엇보다 친절함에 방점을 찍는다. 우선 선과 악을 동시에 상징했던 배역 ‘X’를 선과 악을 각각 다른 배역으로 구분지음으로써 두 캐릭터의 대립을 선명히 보여주게 됐다. 또 넘버의 가사에도 서사를 채워 넣어 이해를 돕고 등장인물에 감정이입 할 수 있도록 이끌어냈다. 이로써 관객들은 고전 속 파우스트의 갈등을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의 고뇌로써 공감하게 된다.

◆캐스팅 변화로 진화한 <드림걸즈>=공연은 극의 수정보다는 캐스팅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진화를 이루기도 한다. 뮤지컬 <드림걸즈>는 배우에 따라 같은 공연에서도 전혀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선 공연들과 비교되는 이번 공연의 포인트는 모든 출연진이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로 꾸려졌다는 점이다. 
 
작품은 세 명의 흑인 소녀가 인종차별과 흑인음악에 대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때문에 넘버 역시 1960~1970년대 흑인음악 세계를 함축한 듯한 노래들로 구성돼 있다. 동명의 영화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Listen’ ‘and I’m telling you’ 등의 곡은 흑인음악 특유의 소울이 듬뿍 묻어있는 만큼 본토의 감성이 오롯이 담긴 목소리와 만난다면 더 깊은 감동을 전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시국과 맞물려 큰 울림 만든 <영웅>= 공연이 절묘한 시기와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내면서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뮤지컬 <영웅>의 이야기다.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다룬 이 작품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돼 순국하기까지의 시간을 좇는다. 2009년 초연된 이 작품은 공연 8년째인 올해에 어느 때보다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고, 죽음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던 꼿꼿한 면모가 ‘영웅’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아닐까. 이 추측이 적어도 출연 배우들에게만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안중근 역을 연기한 배우 안재욱은 한 인터뷰를 통해 “늘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며 처음으로 나라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번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도 나처럼 상처 받은 이들에게 이토록 우리나라를 위해 이렇게 애썼던 분들이 있으니 좌절하지 말자는 위로를 건네고 싶어서였다”고 밝혔다. 이러한 부름에 관객들 역시 응답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 공연에서 기간 내내 국내에서 가장 큰 극장으로 꼽히는 3000석 규모의 세종문화회관을 가득 채우는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수상한 시국을 겪으며 성실한 시민으로서 느낀 상실감을 겪은 이라면, 시대적인 아픔을 극복하게 만들었던 영웅의 모습에서 한 줄기 희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앞서 진화에 성공한 세 편의 공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재공연은 그 자체로 가능성 있는 공연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관객의 검증을 통과하면서도 흥행 가능성에서 승산이 있는 작품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재연 이상의 공연을 고른다면 어느 작품이라도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다. 그러나 가끔은 조금 거칠더라도 톡톡 튀는 아이디어의 공연을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공연을 진화시켜 스테디셀러로 키워내는 것 또한 공연 관람의 또다른 재미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즐거움은 피카츄를 라이츄로 진화시킨 포켓몬 마스터의 그것과 닮아있지 않을까. 

△공연정보
▲<더 데빌> 2.14-4.30, 드림아트센터 1관 에스비타운 
▲<드림걸즈> 4.4-6.25, 샤롯데씨어터 
▲<영웅> 3.11-5.20, 창원 성산아트홀, 광주문화예술회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