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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더 큰 세상으로의 힘찬 날개짓

2018 교단수기 공모 은상 수상작

 

큰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섯 해 전 2월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던 수지(가명)는 웃는 얼굴 위로 또르르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닦느라 애썼다. 
 

내가 그 학교로 전근을 갔을 때 수지는 2학년이었다. 앳되고 예쁜 얼굴에 귀엽게 파마를 한 수지.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맡고 있었던 파란마음반은 특수학급으로, 우리 학교에 한 학급이 있었고 특수교육대상학생으로 선정·배치 받은 학생들이 특정한 시간에 와서 학습을 하기 때문에, 수지는 2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5년 동안 우리 반에서 국어와 수학, 6학년이 되어서는 사회까지 학습했다. 애기 같았던 수지가 거의 내 키만큼 자라는  5년은 함께 공부하고 체험하며 웃고 울고 많은 걸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그 마음에 졌던 응어리를 푸느라 애썼던 시간이었다.
 

그 졸업식은 둘이 함께 했던 시간을 마무리하고 수지는 중학교로 진학을 나는 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 하는 시점에 있었다. 5년 동안 함께 했던 시간을 뒤로 하며 아쉬운 마음과 졸업하면 학교를 찾아와도 엄마처럼 의지했던 선생님이 없다는 상실감에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도 흐려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더욱 밝은 목소리로 수지를 위로했다.
 

“선생님하고 메일 보내는 거 알지? 메일로 선생님하고 얘기하고 나중에 선생님 보고 싶으면 선생님 새로 가는 학교로 놀러 와도 돼. 그리고 놀이치료 선생님은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수지와 함께 수긍해 주시며 다독여주시는 수지 할머니. 나도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과 애틋함을 다독였다.
 

수지는 수줍고 착하고 마음이 여렸다. 수학시간에 덧셈을 배우다가도 잘 이해를 못하고 모르겠으면 큰 눈을 껌벅이고 있다가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조금만 어렵다고 느껴지면 울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어려운 게 아니라고 선생님이 쉽게 알려준다고 해도 지레 겁을 먹고 거부했다가 그 단계를 넘어가면 쉽다며 또 생글생글 웃었다. 그런 과정을 과정을 여러 번 거치니 나중엔 울지 않고 집중했고,  5년 동안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까지 학습할 수 있었다. 그 시간에 한글도 익혀 스스로 책도 읽을 수 있게 됐다. 5·6학년 때는 함께 그림책을 읽어주면 그 내용에 폭 빠져서 듣고는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해 질문에 대답도 잘 하더니 점점 자신의 생각도 자신의 말로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책을 읽어 준 후 쉬는 시간에는 혼자 책을 보며 책으로의 여행을 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내 마음도 흐뭇했다.
 

수지의 이런 발전된 모습이 내 맘에 더욱 다가오는 것은 수지의 어머니가 3학년 때 집을 나가셔서 수지가 그 아픔을 소리 없이 감내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지가 2학년 때 수지 어머니와 상담전화를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전화를 받는 엄마에게 큰 소리로 떼를 쓰는 수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학교에서는 다른 친구들도 잘 도와주고 교사의 말도 잘 듣고 생활도 잘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엄마에게 저렇게 떼도 쓰고 어리광도 심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느 날 수지와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가 집에 안 계시다는 얘기를 얼핏 하는데 이래 저래 물어보니 엄마가 며칠 동안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집을 나가신 거였다. 처음엔 아빠와 동생이랑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것 같더니 얼마 후에는 동생과 큰댁에서 지낸다고 했다. 아빠는 저녁 때 잠깐 와서 아이들을 보고 집으로 가시고 수지는 큰댁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큰댁에는 할머니, 큰 아빠, 큰 엄마, 사촌 언니와 동갑인 동성 사촌이 있는데 거기에서 같이 지낸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명랑하게 하는 수지를 보고 있노라니 내 맘 한 켠이 시려 왔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엄마, 아직 어리광도 많은 나이라 엄마가 없는 집도 힘들 텐데 큰댁에서 지내며 점차 발길을 끊으려는 아빠와 중학교 들어가면 같이 살 수 있다는 약속을 했다는 아이.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어떻게 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상황에 수지는 가끔 멍하니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밝게 얘기하다가도 엄마 얘기를 하면 눈빛이 흐려졌다.

 

조카들을 키우며 자기 자식에게 마음껏 애정표현 하는 것도 조심스럽다는 큰 엄마의 심정도 이해되고 나이가 같은 사촌만 예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수지의 마음도 안쓰러웠다. 수지의 남동생은 과격한 행동으로 그 마음을 표현했고, 수지는 착실하게 지내는 것 같았지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하는 수지의 남동생은 조치가 빨랐다. 불만사항을 해결해 주고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여 개선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수지는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어려웠다. 
 

그러다가 우리 반에서 운영하는 방과후교실에서 모래 놀이치료를 개설하게 되었다. 수지는 누가 데리고 치료실을 다닐 상황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육청에서 특수학급에 지원해 주는 방과후교실 운영비와 특수학급 운영비를 이용해 강사를 구하고 모래 놀이 교구를 샀다. 치료 시설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모래 놀이를 할 수 있도록 갖췄다. 모래 놀이를 이용한 놀이치료는 평소에 말로 하지는 못하지만 모래 놀이에서 여러 도구들을 가지고 놀면서 마음 속 표현하지 못한 말들과 생각들을 표현하고 치료사와 대화하며 점차 회복해 나가는 활동이다.
 

다행히 수지는 마음이 순수해 놀이상황에 자신의 마음을 잘 녹여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 활동을 할 때에는 나는 교실을 비워주고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놀이치료 선생님 말씀에 수지가 엄마 뱃속에 있고 싶어 한다며 지금의 마음 상태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고 해결하지 못하고 응어리 진 것을 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했다.

 

얼마 뒤 놀이치료 선생님은 이제 그 시기를 벗어나 갓 난 아기와 같은 표현을 한다고 했다. 선생님의 말만 듣고 그 정도인가 했는데 모래 놀이치료가 조금 늦게까지 이어졌던 날, 끝날 시간쯤 되어 교실 앞에 갔을 때 교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응애 응애” 울음소리는 수지가 내는 소리였다. 소꿉놀이 하듯 아기 소리를 내며 젖병으로 우유를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놀이치료 선생님은 수지가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다며 이제는 유아기로 넘어왔다고 해서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하니 그 시기의 충족되지 못했던 것을 본인이 충족되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그 시기에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이제는 젖병으로도 빨대로도 안 먹고 컵으로 마시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수지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응어리들을 모래 놀이를 통해 마음껏 발산했다. 그리고 회복돼 가고 있었다. 그 안타까운 상황은 바꿔줄 수 없었지만 그 마음을 쏟아놓을 곳이 생겨 본인도 그 시간을 기다렸고, 밝아지는 수지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가벼워져 갔다. 
 

그 즈음에 나는 우리 반 학생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수업을 1년 동안 진행했다. 책을 읽은 후 사후활동으로 여러 가지 기법들로 토론을 접목시켰다. 수지도 잘 참여했다.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을 때 스스로 그 마음을 표현하도록 사진, 그림들과 함께 쉽게 나온 두께가 다른 세 종류의 ‘안네의 일기’책을 보여주고 읽어줬다. 안네의 상황과 이야기를 해 주며 내용 중에 ‘종이는 사람보다 인내심이 강하다’는 문구를 알려주고 수지도 힘들 때, 아무에게도 내 마음을 말하기 힘들 때, 글로 써 보라고 얘기해줬다. 그렇게 수지는 단단해져 갔다. 쉬는 시간에 책을 볼 때도 안네의 일기를 옆에 두고 즐겨봤다. 
 

6학년을 거의 마칠 즈음에는 이메일 사용하는 법을 알려줬다. 핸드폰도 바뀔 수 있고 주소도 바뀔 수 있지만 메일은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기에 메일로 편지를 주고받는 법을 익혔다. 
 

놀이치료는 얼마간 더 해야 하기에 중학교 특수학급 선생님과 상의하고 중학교에도 개설해 진학 후에도 이어서 할 수 있게 됐다. 그 뒤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놀이치료를 그만 두게 되었다. 놀이치료 선생님 말씀으로는 너무 씩씩해져서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동안에도 수지와 이메일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2년 전 어느 날 전근 간 학교로 그 학교를 졸업한 친구와 고등학생이 된 수지가 찾아왔다. 어느새 나보다 더 커진 수지가 큰 눈을 반달로 만들며 환하게 들어왔다.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에 순대에 어묵을 먹으며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 하는 수지의 모습에 더없이 즐거웠다. 
 

이제 고3이 되어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수지는 전처럼 이메일을 잘 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서, 나는 기쁘다. ‘날려 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운다’는 도종환 시인의 ‘스승의 기도’처럼 넓은 하늘을 힘찬 날개 짓 하며 날아오르는 수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벅찬 마음에 웃음 지어 본다.

 

[2018 교단수기 공모 은상 수상작-수상 소감] 제자들에게 조언자이자 버팀목 되고파

 

몇 년 동안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이야기를 마감일에 겨우 맞춰서 냈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면서 순간순간 기록하고 싶은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늘 마음속에서 되뇔 뿐 마음먹고 글로 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지와의 이야기는 새벽의 알싸함처럼 조금은 애잔하고 무거움에서 출발하지만 여명이 어둠을 물리치면 움츠린 가슴을 펴고 빛으로 나아가듯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은상 수상소식을 듣고 다시 저의 글을 읽어보니 한편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퇴근하는 내내 배시시 웃음 짓게 했던 기쁨, 벅참, 즐거움은 생각할수록 기분을 좋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저를 성장시켰고, 성장시키고 있는 많은 제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제게는 깊고 울림이 있는 말과 글로 힘을 주고, 제가 하는 이 일에 대해 끊임없이 지지해 주시는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 계십니다. 은사님이기도 하고 인생의 선배이신 선생님처럼 저도 제자들에게 기쁘고 힘들 때 생각나는 선생님, 마음이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주는 조언자이자 버팀목이 되어주는 든든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더 큰 세상으로 날개 짓을 하는 수지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과 오늘도 묵묵히 애쓰시는 동료 교사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이런 장을 마련해 주신 한국교육신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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