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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청년 학생은 민족의 미래…조선인의 명예 위해 원기 키우자”

④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1.9~1931.7.23)

민족주의적 사회교육 경향 대표하는 소년운동 지도자
‘어린이’ 용어 처음 사용…색동회 조직하고 잡지 창간
매체 중심의 교육 중시…“신문‧잡지가 교재로 더 적합”
식민지 제도교육 대체하는 대안적, 공공적 교육 전개

 

한국에서 진보주의 교육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때 방정환(1899-1931)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방정환은 뛰어난 교육자였지만 교육학 분야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그의 활동이 제도교육보다는 언론 계몽 활동이나 소년운동 형태로 주로 전개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협의의 제도교육에 제한해 본다면 그에게 교육은 주된 관심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할 경우 그의 활동은 대부분 교육적인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방정환의 방대한 저작은 식민지 시기 교육사에 대한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가 아동·청년에 대한 사회교육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수많은 동시와 동화를 남긴 아동문예 운동가이기도 했지만, 천도교 계열에서 편찬한 어린이, 학생, 신여성 등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그의 산문들을 보면 교육 사상가로서의 방정환을 조명해볼 수 있다. 산문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교육론은 아동문학자이자 소년운동 지도자로서의 위상과 함께 당시 교육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개혁하려는 공적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어린이가 인내천의 사도(使徒)라는 ‘동심천사주의’와 일본 도요대학 유학 경험에서 발전된 아동 문예운동과 천도교 사회주의 관점으로 그의 교육론에는 동학적 요소, 신교육운동적 요소, 민족주의적 요소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있다. 암울한 시대를 짧게 살다간 활동가였지만 수많은 글들을 남겼으며, 그 글들 속에는 당시 교육에 대한 다양한 비평들과 아동 및 청년교육에 대한 애정 어린 기대가 녹아 있다.
 

 

방정환은 33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살다 갔지만 한국 문화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1899년 11월 9일 서울 당주동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조부는 상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는 동학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유복했으나 아홉 살에 집안의 사업 실패로 궁핍한 생활이 시작됐다. 어린 시절 경험한 가난은 방정환의 사회의식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성소학교, 매동보통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선린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중퇴했다. 토지조사국에서 지적대장을 옮겨 적는 임시직 사자생으로 일하다가 천도교도로서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소개돼 19살에 그의 셋째 사위가 됐다. 결혼 후 보성전문학교 법과(보성법률상업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신문을 인쇄하는 활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구금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20년 일본 동경 유학을 떠나 도요대학에서 문화학을 공부하고 1923년에 귀국(청강생으로 재학, 1921~22)하기까지 아동문학과 사회주의사상을 접했다. 1920년대 초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사업을 하면서 소년부를 만드는 등 소년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미 동경 유학을 가기 전부터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던 그는 동경에서 ‘개벽’지의 특파원을 맡으며 색동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소년운동의 중심이 된 ‘어린이’ 잡지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방정환에게 매체운동을 통한 소년운동은 독립운동이자 민족운동이었다.
 

1923년 5월 1일에는 천도교, 불교 등 소년회가 연합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후원한 ‘어린이날’ 행사가 개최됐다. 이는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주도로 이뤄졌던 행사가 확대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1923. 5. 1)에 따르면 어린이날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대우를 하자고 외치는 날’ 이었다.
 

방정환의 교육론은 아동중심 교육론, 실생활중심 사회교육론, 민족주의 교육론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 방정환의 교육관은 철저하게 아동·청년에 대한 애정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어린 사람의 세계는 ‘어른의 세상과는 전혀 딴판인 조금도 같지 않고 딴판인 세상 하나가 따로’(천도교와 유소년 문제, 신인간, 1928.1) 있는 것이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가르침은 성인이 교화의 주체가 되기보다 항상 새로워지도록 노력하며 오히려 젊은 세대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자세였다. ‘낡고 묵은 것으로 새것을 누르지 말자!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아동문제 강연자료, 학생, 1930.7)라는 아동관은 어린이가 ‘산한울’이라는 그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아동의 얼굴 안에서 ‘우리가 전부터 생각해오던 한우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한울 뜻 고대로의 산 한우님’(어린이 찬미, 신여성, 1924.6)이라며 아동을 예찬했다. 
 

방정환 교육론의 목표는 ‘조선의 소년 소녀 단 한 사람이라도 빼지 말고 한결같이 좋은 인물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모두가 함께 맞이할 ‘우리의 장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고 봤다.(사랑하는 동무 어린이 독자 여러분께, 어린이, 3권 9호, 1925.9)
 

방정환은 당시 진학을 위한 교육열이 높아지고 있지만 식민지 하에서 취업이 어려운 상황,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으로 원기가 없는 청년 학생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들에게 삶의 기술을 제공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공허한 지식교육 대신 실생활을 준비시키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 방편으로 매체 중심의 사회교육을 중시했다. 이때 실생활교육이란 단순한 실용성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안목과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방정환은 당시 학교 현실은 대다수의 학생에게 이런 능력을 제공하고 있지 않으며, 진학이나 취업에 성공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해 많은 학생이 ‘남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진급또 신입하는 학생들께, 학생, 1930.3) 따라서 그는 남의 공부 대신 실생활에 대처할 수 있는 자기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실생활과 관계가 적은 문자만 골라 모은 판에 박힌 학교의 교과서보다 실사회에서 직접 일어난 것들을 다루는 신문과 잡지가 교재로 더 적합하다고 봤다. 방정환은 신문·잡지만 공부하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골고루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2년만 계속하면 몇 년간 중등교육을 받은 학생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을 가진 훌륭하고 유용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봤다.  
 

그가 생각하는 ‘실제의 삶’은 매우 치열한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식민지에서 ‘무수히 짓밟히고 학대받는 생명’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봤고 이러한 현실을 통해 학교 교육보다 몇 백 배 더 유용한 산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편집인, 시골집에 가는 학생들에게-남겨 놓고 올 것, 배워 가지고 올 것, 신여성, 1924. 7)
 

그는 당시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청소년 운동단체와 같은 사회교육 기관의 역할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방정환은 조선의 소년운동을 방해하는 두 개의 축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는 낡은 인습에 젖은 부형들이며, 다른 하나는 준일본인을 만들려고 하는 총독부의 교육방침이라고 지적했다.(세의 신사 제현과 자제를 둔 부형에게 고함, 어린이 창간호 선전문, 개벽, 1923. 3)
 

실제로 많은 공립학교들에서 소년회에 가면 퇴학시킨다거나 어린이 잡지를 읽으면 벌을 준다고 학생들을 위협했을 만큼 어린이·청소년 매체 운동의 영향력은 컸다. 아동에 대한 활동은 나아가서는 성인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매개라고 본 것이다.(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특히 소년 이외의 일반 큰 이에게, 개벽, 1923. 1)
 

방정환에게 청년 학생은 새 운명(미래)의 책임을 미리부터 지고 있는 존재로, 조선인의 명예를 위해 원기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선 학생의 기질은 무엇인가. 학생, 1929. 5)

 

특히 그는 청년 학생이 원기를 회복하면 교원도 자극되고, 부형도 자극되고, 일반 사회도 자극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흥하는 패기가 삼천리 전체로 확산돼 모험과 지지 않으려는 기백이 그 속에서 샘 솟아날 것을 기대했다. 청년 학생은 민족 전체의 미래이기 때문이었다.
 

 

방정환에게 비친 식민지 총독부 제도교육은 조선 청년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특히 실생활에서 주체적 사회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하지 못하는 취약한 교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관심은 신문·잡지 교육이나 대중적 강좌 등을 통해 산지식과 산교훈을 제공하는 (사회)교육에 있었다. 그가 관여한 매체 중심의 활동은 그 자체가 식민지 제도교육을 대체하는 대안적이고 공공적 교육활동(public pedagogy)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의 교육사상은 토착적인 동학사상을 출발점으로 하면서, 당시의 세계적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신교육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식민지 제도교육의 확대 강화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적 사회교육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방정환 사상이 지닌 이러한 특수성과 보편성은 교육사적으로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해방 이전 우리 교육사에 나타난 진보주의적 교육 실천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