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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피지배 영역에 뛰어든 지배 진영의 이단아
경성제대서 경제학 가르치며 조선인 처지 공감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마르크스 혁명이론 실천
李載裕 은닉죄로 복역… 가족도 경찰에 시달려

 

 

수탈과 강압적 지배로 상징되는 일제 강점기 이미지 속에서 식민 지배자와 함께 들어온 민간의 일본인들은 관심의 바깥에서 주목받지 못하거나 식민 지배자와 동일한 범주로 간주돼 왔다. 이들 민간 일본인에 대해 일찍이 한 일본인 연구자는 이들 수많은 일반 서민들에 의한 ‘풀뿌리 침략’이 ‘일본 식민지 지배의 강인성’을 보인다고 평한 바도 있다.

 

실제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 거주자는 1900년대에 전체 인구의 1%에 지나지 않았지만 식민지배 말기에는 거의 3%에 이를 정도로 증대했다. 1910년 시점에서 재외 일본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 상위 6개 도시가 조선에 있었고 1940년 재외 일본인의 인구수는 만주국 82만 명에 이어  조선에 70만 명 정도가 거주했다.
 

이들 일본인 대부분은 식민 지배 기구의 관료나 금융, 회사 등 이른바 공무자유업에서 조선인과는 분리된 상태에서 거주했으며, 조선인과 접촉이 비교적 많았던 직업으로는 경찰과 더불어 교사를 들 수 있었다. 식민 지배의 최전선에서 일제의 식민정책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그로서 교사의 최정점에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집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1926년 개교 당시 25명에 불과했던 이들은 일제 말기까지도 법문학부 60명을 포함해 200명에 못 미치는 소수였지만 ‘국가수요(國家須要)의 학술’을 표방한 이들은 식민 기획의 이념을 창출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그와 명운을 함께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일본 식민정책에 호응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식민 지배의 기획을 부정하고 식민지 피억압 민족과 연대를 추구한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 관료로서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일하면서 조선의 민속민예운동을 이끈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가 있으며 교사로서는 본 기획에 소개한 바 있는 죠코 요네타로(上甲米太郞)나 이케다 마사에(池田正枝)가 있다.

 

조선 민족과 함께 식민지 반제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의 감동적 이야기는 일찍이 ‘우리 청춘의 조선’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식민지 조선의 최고학부인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신분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혁명운동에 가담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는 이러한 점에서 주목된다.
 

1899년 10월 20일 오사카에서 태어난 미야케는 대만에서 소학교와 타이뻬이(台北)중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에 있는 다이하치(第八)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6월 옥중에서 예심판사에게 제출한 전향문에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사회문제연구’를 읽으면서 사회문제와 빈부 격차에 의문을 가지게 됐다고 언급했다. 1920년 졸업 후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한 그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배경으로 당시 일본에서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그 해결책을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찾고자 했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사립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서 재정학과 경제학 강의를 맡아 가르쳤다. 이 강의를 수강한 조선인 학생들을 통해 그는 조선인이 민족으로서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 이들의 생활이 오늘날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정신적·물질적으로 이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고 있는지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나는 그것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식민지 피지배민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이런 경험의 기저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대만에서 보낸 그의 원체험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교수로 부임한 것은 1927년 4월이었다. 이 대학에서 그는 법문학부 2회인 이강국(李康國)과 박문규(朴文奎), 최용달(崔容達) 등 조선인 학생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유물사관과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친 그는 이들이 만든 마르크스 사회과학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1929년부터 1931년에 걸쳐 그는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재외연구’를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독일공산당과 노동자 대중이 참여하는 가두행진과 메이데이 시위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구니사키 데이도(國崎定洞)가 주관한 ‘재독 일본인 좌익그룹’이나 베를린 거주 일본인의 ‘혁명 인텔리 켄차모임’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면서 가타야마 센(片山潛) 등과 함께 제2회 국제반제동맹대회에 일본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면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의 적은 천황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31년 4월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경제연구회의 후신인 조선사정연구회를 지도하면서 주로 조선인 졸업생이나 조수, 학생들과 함께 자료수집이나 독서회 등의 활동을 했다. 대중 활동으로 ‘미야케 경제교실’을 조직해 운영하는가 하면 경성제대 공개강좌에서 계획경제를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에 민족해방운동을 궁극의 목적으로 서울의 합법·비합법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수한 조선인 운동가들을 만났다. 대학의 경제연구회를 중심으로 이강국, 박문규, 최용달, 정태식(鄭泰植) 등과 아울러 1930년대 서울의 혁명적 노동운동을 주도하던 주요한 두 흐름인 이재유(李載裕) 그룹과 이른바 국제선의 권영태(權榮台) 조직의 주요 성원들, 그리고 ‘이러타’지를 중심으로 형평청년전위동맹에서 활동하던 이남철(李南鐵)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남철은 해방 정국에서 조선학술원, 민주주의독립전선과 1960년 4·19혁명 이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서 활동한 이종률(李鍾律)의 필명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꿈꾸던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자신의 혁명 이론을 실천하는 길에 나서게 됐다.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연구가 필연으로 발전한 결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의 공감과 연대 의식이 고양돼 갔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일반론과 조선 민족의 현실이라는 특수론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한 자신의 실천이 나왔다는 것이다. 청소년기 식민지 대만에서의 경험은 조선에서 식민지 피지배민족의 처지에 대한 공감으로 연결돼 마침내 이들과 함께 연대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변혁운동을 실천하는 단계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반제운동과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에서 열렬한 활동을 하던 미야케는 당시 유명한 혁명운동가인 이재유를 자신의 동숭동 교수 관사 지하에 토굴을 파 37일 동안 숨겨준 일을 계기로 1934년 5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향후 옥중에서 작성한 전향문에서 그는 이날 아침 며칠 전부터 감기에 걸린 3살 난 큰아들이 어린이다운 불안함으로 서성이면서 현관 앞에서 자신에게 안겨 자신이 체포되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광경을 결코 지워버릴 수 없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검찰에 송국돼 예심이 시작된 직후인 1934년 6월 그는 대학으로부터 휴직 처분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35년 1월 면직됐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및 범인 은닉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의 아내인 히데도 이재유를 숨겨준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같은 해 5월 24일에 취조를 받고 기소유예에 처해졌다. 석방된 이후에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일제 경찰의 지속적인 내사에 시달렸다. 
 

미야케가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경성제대 졸업생으로 미야케의 제자인 최용달 등의 도움으로 쌍림동(당시 병목정)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34년 11월에는 조선인 운동자인 김윤회의 배려로 명동(당시 명치정 2정목)에서 ‘가메야(龜屋)’라는 고서점을 열었다. 그런가 하면 전술한 이종률도 그의 아내에게 2000원의 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형태로 적극 후원했다. 
 

미야케는 전향한 사실이 고려돼 형기 만료일인 1937년 11월에서 11개월을 남겨 둔 1936년 12월 가출옥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판결 이후 그는 재판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하면서 보석을 신청했는데 보석이 허가되지 않자 공소를 포기하고 복역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사법 권력과 대학들이 이른바 ‘미친 놈’으로 취급해 따돌림으로 응대하는 등 일본인 사회로부터 온갖 압력과 회유를 집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출옥 이후에 그는 아내가 경영하던 고서점을 정리하고 1937년 1월에 일본으로 돌아가 고물상(자동차 해체업)과 신문판매점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는데 특고(特高)의 감시는 패전까지 계속됐다. 
 

일반적으로 식민 지배 블록에서 식민지 피지배민들과 식민지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들의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지식인들 중에는 자유주의나 사회·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거나 공감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인 사회에 대해서는 짐짓 무관심과 불개입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의식 안에서는 식민지 체험이 일정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하더라도 일상에서는 부재하는 현실로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식민지 시기 지배민족과 피지배 민족 사이의 연대가 드문 이유 중의 하나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식민지 현실에서 미야케가 활동한 궤적의 전체상을 명확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민지 피지배민으로서 조선인과 조선 민족의 비참한 현실에 깊은 공감을 가지고 이들과 연대해 일본의 식민 기획을 부정하는 매우 드문 사례를 남겼다. ‘사상사건’으로 투옥된 유일의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 그것도 대학교수라는 지위에 있던 인물이 사상사건과 관계해 투옥된 희유의 사건”이었다.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동정과 연민의 발로이건 혹은 이념을 함께 하는 동지로서의 연대의 표출이건 간에 그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뚜렷하게 설정돼 있던 식민지 사회에서 지배 영역에 속하면서도 피지배 진영에 자발적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총체적인 몰락과 불행을 감수해야 했다.

 

조선에서 그가 보낸 시간이 10년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대가와 지배 블록의 보복은 어둡고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실상,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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