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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에서 책읽기-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상강(霜降) 즈음입니다. 황금빛으로 물결치던 들판이 조용히 비어가면 산기슭에 잘 여문 밤알이 투두둑 떨어질 것입니다. 주홍감에 속 깊은 단맛이 깃드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런 계절엔 철학책이 당깁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자 들뢰즈의 책 몇 권을 읽어보려고 책장을 뒤적이다가 연필로 휘갈겨 쓴 메모가 붙어있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 나비 그림이 그려진 책을 발견했습니다.

 

“2016년 2월 19일, 늘 새로운 책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 준다.”

 

까맣게 그어진 밑줄이 가득한 책을 다시 읽어보니 그 때나 지금이나 철학책은 낯설고 어렵고 매력적입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1942년작 「황소 머리」는 얼핏 보면 황소 머리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전거 핸들에 안장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작품을 자전거 핸들로 보아야할지, 아니면 황소머리로 보아야 할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갈등과 모호함 자체를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뜻이 황소 머리일 수도 있고 둘 중 어느 것도 확고하게 결정된 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으로 이 작품이 언어가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기호라는 구조주의 언어관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철학과 예술은 모두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철학자 박영욱은 『데리다&들뢰즈: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라는 책을 통해 현대 문화 예술 분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 데리다와 들뢰즈의 핵심적인 개념을 예술적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현대적 철학자로 불리는 데리다와 들뢰즈 두 사람은 ‘차이’의 철학자로 부르는 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차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동일성이란 같다는 말이고 차이란 다르다는 말입니다. 즉 동일성을 강조하면 차이가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도 한옥도 정원이 있는 커다란 집도 모두 집입니다. 결국 ‘집’이란 말만 놓고 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개념으로 따져 생각하면 차이가 없어지고 동일성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데리다와 들뢰즈는 개념을 거부합니다.

 

표상이란 우리가 세계를 분류할 때 머릿속 개념입니다. 공간을 예로 들면 우리는 주로 동서남북이라는 네 개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편의상 나눈 기준일 뿐입니다. 이러한 기준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면 마치 세계가 네 개의 방향을 지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표상이 이러한 것입니다. 표상에 빠지게 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제각기 고유한 특이성과 차이들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표상적 사유에 대한 반발과 그러한 사유에 의해 억압된 차이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념 없는 시선으로 화폭에 담으려 했던 사물들의 차이, 클랭 파랑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파란색이 일깨워 준 색의 차이 등 모든 존재에 잠재된 독특한 개성을 억압하는 서구의 왜곡된 사상을 거침없이 비판하고, 다양하고 차별적인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데리다와 들뢰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통적인 개념을 신랄하게 뒤집는 전복적인 사고와 집요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한 두 사람의 사상이 펼쳐진 책입니다.

 

바람에 사색의 향기가 섞여있습니다. 지르렁 지르렁 우는 방울벌레 소리가 화단을 넘어 아스발트 위로 흘러갑니다. 좋은 가을되시기 바랍니다.

 

『데리다&들뢰즈: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박영욱 지음, 김영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