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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어른의 직무유기 “못 본 척 하는 게 나아요”

“과거 청소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필자는 “아니요. 절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힘든 어른의 시기를 다시 산다는 것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렇다. 게다가 살아오면서 힘들게 체득한 모든 귀중한 경험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도 아깝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어른이 되어 다시 살아갈 생각이 힘들게 느껴질까?

 

간단한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해 본다. 요즘 어른들은 청소년과 갈등을 빚거나 원치 않는 사건에 연류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청소년 따로, 어른 따로 방식의 사회관계망이 형성되어 간다. 그 기저엔 연령대에 따라 동년배끼리 아니면 비슷한 연령대가 생각을 공유하고 삶을 연대함으로써 효율적일 때가 많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동일 연령 집단끼리는 다양한 사고와 경험의 부재로 인해 대체로 계획과 행동이 미숙하고 끼리끼리 동질화되어 반사회적인 행동수칙을 고수하기 쉽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겠다. 몇 년 전에 필자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점심 식사 후에 식당 출구로 나왔는데 앞에 두 명의 남학생이 걸어갔다. 뒤에서 20미터 정도를 곧장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나누는 말이 들려왔다. 그중 한 학생이 도저히 듣기 거북한 욕을 하는 언어 습관을 보였다. 그래서 한마디 거들었다. “말은 인격의 표현인데 너무 지나친 것 아냐? 어떻게 그렇게 쉴 새 없이 욕을 하니?”라고 했더니 당사자가 “누구요? 저는 욕을 안했어요”라며 말대꾸를 했다. 뒤에서 계속 욕하는 소리를 듣고 확인까지 했는데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꾸한 학생의 어깨 쪽을 툭 치며 “너 말이야, 쟤가 아니고.”라고 말했다. 그 순간 즉시 “어, 선생님, 폭력을 휘두르는 거예요?”하며 반발을 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고 아차 싶어서 움찔했다. 그러고는 이내 “부딪히지 말자. 말이 통해야 소통이 되지. 저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거야”라고 읊조리며 더 이상 어른이자 교사가 되기를 포기했다.

 

요즘 학교가 이런 식이다. 배움의 터전인 학교에서조차 어디 청소년 교육이 되겠는가? 혹자는 지나친 일반화가 아닌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사례를 들어보자. 몇 해 전에 서울을 다녀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네댓 명의 고등학생이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목격했다. 전철의 손잡이를 철봉 삼아 몸을 심하게 흔들며 마치 싸우듯이 소리를 지르는 남자 고등학생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끼어들었다.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공용 지하철이야. 조용하게 가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니 좀 조용히 해줄래?”라고 지적을 하자 눈치를 보며 슬쩍 피하는 듯 하더니 곧바로 조금 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봐, 어른 말이 안 들리나?”라고 채근한 것은 다음이었고 그 말이 화근이 되었다. 눈을 부릅뜨고 짜려 보면서 다음 역에서 “에이~ 시X, 재수 X나 없어”라고 말하며 내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신들의 잘못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공중도덕에 무감각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어른에게 욕을 하며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내뱉는 청소년들이 한둘이 아니다. 집에 와서 그 사실을 말하니 아내가 펄쩍 뛴다. “그러다 아이들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저 못 본 척하는 게 나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현실이 이러니 도대체 어떻게 청소년들에게 기본적인 예의와 교양을 가르칠까? 그냥 모른 척하면 만사형통인가? 갑질이고 꼰대 짓이니 차라리 피하는 게 나은가? 내 아이가 그래도 참아야 하나?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진다.

 

또 다른 이야기다. 역시 전철에서의 사건이다. 5~6세 정도의 어린이를 동반한 미국인 부부가 서울의 어느 역에서 승차를 했는데 전철 안에는 이미 승객들로 가득 차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때 몹시 지쳐 보이는 아이가 문 가까이에서 지지대를 붙잡고 있다가 중간에서 손님이 자리를 비우자 잽싸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서 의자에 쏙 앉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즉시 “그 자리는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야. 주변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우선순위가 있는 거야. 어서 일어나 오너라.”하자 그 아이는 힘들게 일어서서 아빠에게 다가와 안기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의 아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Oh, Good boy!”라고 칭찬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선진국의 자녀 공중예절교육이고 어른의 직무라는 것을 실감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아이를 동반한 식당에서 먼지를 날리며 팔짝팔짝 뛰어다녀도 아이를 제대로 제지하지 못하는 어른들, 아이가 지하철 의자에 신발을 신고 올라서는 걸 그대로 방치하는 어른들... 온통 직무유기 뿐이다. 살짝 끼어들어 한마디 하면 이내 어른 싸움이 된다. 왜 아이 기를 죽이냐고.

 

아프리카에는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 마을의 모든 어른들이 나선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그랬다. 마을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젊은 사람은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어른들의 한 마디 지적은 큰 가르침이 되었다. 이제는 먼 옛날의 전설처럼 들린다. 심지어 그런 일이 있었냐고 의아해하면서 되묻는다. 이렇게 어른들로 하여금 직무유기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날 다행스럽게도 청소년들로부터 보복성 폭력을 당하지 않았지만 극히 위험한 상황을 유발할 수도 있었음을 등골이 오싹하게 느낀다. 이런 비슷한 일이 매일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들려온다.

 

그렇다. 어른은 어른 역할을 해야 비로소 어른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거실에서 큰 소리로 TV를 본다거나, 책 한 권을 아이들 앞에서 읽을 줄 모르는 어른들이나 직무유기는 마찬가지다.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서 자신은 술에 취해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모습은 아주 죄질이 나쁜 이율배반적 행위다. 어른이 한 말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서고 질서가 잡힌다. 맹목적인 권위의식이나 갑질, 꼰대 짓이 아니고 진정한 청소년 교육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교육기관인 학교에서조차 청소년 교육을 기피한다. 단지 그들과 부딪혀 득 될 것이 없다는 이유와 지나친 보신주의, 이것이 직무유기의 극치를 이룬다. 욕하는 청소년, 쓰레기 버리는 청소년, 침과 가래를 뱉는 청소년, 책상 위에 누워서 잠자거나 떠드는 청소년, 복도를 지나치며 큰소리로 노래하는 청소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돌출, 일탈행동들이 있건만 학교는 이를 제지하는 어른 없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지난다. 물론 개중에는 관성에 의해 용감하게 과거 방식을 살아가는 어른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젊은 교사들은 교사이기 이전에 어른의 직무를 포기한 학교 현장, 이것이 요즘 어른들의 직무유기처가 되었다.

 

그래서 너무도 부끄럽다. 어른의 직무유기, 그것은 바로 절망으로 치닫는 우리의 현실이다. 교육혁신을 부르짖고 목청을 높여 말하는 인성교육이 한 마디로 무색하다. 잠시 나 하나 편하자고 눈길에서 제외하는 청소년들은 길 잃은 양이 된다. 착한 목자는 결코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어른의 직무유기 현상을 엄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어른의 삶은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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