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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에서 책읽기-가을, 침묵의 시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상강지절이다. 화단 언저리의 화살나무잎은 청량한 붉은 색으로, 산기슭의 개옻나무는 염부주의 화염처럼 새빨갛게 자신을 드러낸다. 내가 사랑하는 신갈나무숲은 가장자리부터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참 좋은 시절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지난 여름 뜨거운 목소리로 바깥을 향해 내질렀던 말들을 천천히 불러들여 내 안의 침묵과 만나게 해야 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책 『침묵의 세계』를 가방 속에서 잠자리까지 계속 들고 다니며 읽었다. 책에 나오는 한 구절 한 구절이 절절하게 아름답고 경건하고 심오하다. 가을과 잘 어울리는 책이다. 내면에서 기절하듯 숨어있는 나의 다른 언어, 침묵과 만나 맑은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한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며,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면 스스로 옮겨 갈 수 있는 어떤 상태 그 이상 것이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발전하거나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을 틔우는 것과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물 속에 깃든 신적인 것의 자취는 침묵의 세계와 연관됨으로써 보존된다.

어느 순간에나 인간은 침묵을 통해서 시원적인 것의 곁에 있을 수 있다.

 

침묵은 어떤 태고의 것처럼 현대 세계의 소음 속으로 뛰어와 있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모든 소음은 다만 그 태고의 짐승, 즉 침묵의 드넓은 등에 붙은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 같다.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그 충만함은 말속으로 흘러나오지 못할 때에는 그 자체로 인하여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언어는 단지 하나의 세계에 딸린 부속품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이다. 언어는 모든 목적성을 초월하는 충만함을 지니고 있다. 언어에는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이 있다.

 

말은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말하기 적전의 순간에 말은 아직도 자신이 방금 떠나온 침묵 위에서 떠돈다. 그것은 침묵과 말의 중간에서 떠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으며 수많은 명문장과 깊은 사유를 만나 무척 행복하였다. 내 속에서 언어와 침묵은 서로에게 존재를 드러내었으며, 나는 언어의 무한한 보고인 침묵과 그 침묵이 발현된 언어로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다짐하였다. 이 가을, 일독을 권한다.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까치, 2010(3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