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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조건 건국 반대한 정몽주, 왜 조선의 지배자가 됐나

 

새해를 맞아 ‘라이프&역사’ 연재를 시작한다. 5000년 한국사에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을 짚어보는 기획이다. 1월에는 포은 정몽주에 대해 알아본다. 1월 21일(음력 12월 22일)에 태어난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해 죽임을 당했지만,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끈 진정한 지배자로 기록돼 있다. <편집자 주>

 

‘죽어서는 용인’의 유래
 

용인이 명당이 된 것은 정몽주의 묘가 생기고 난 이후이다. 포은 정몽주의 묘소는 용인시 모현읍 능곡로(능원리)에 있다. 포은의 묘로 향하는 곳곳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다.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 죽전이다. ‘죽전(竹田)’은 ‘대나무밭’을 뜻하는데, 이곳에는 대나무밭이 없다. 포은이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선지교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바뀌었다. 대나무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상징한다. 태종 7년(1407) 고향 영천으로 안장하기로 하고 포은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났기에 죽전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죽전을 지나 풍덕천에 이른다. 원래 풍덕천은 ‘풍덕내’였다. 포은의 묘소가 개성의 풍덕에 있다가 이곳을 거쳤다고 하여 ‘풍덕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의 올‘래(來)’자를 써서 ‘풍덕내(來)’라고 불리다가 ‘내’를 ‘시내’로 잘못 해석하여 풍덕천으로 불렸다.
 

포은의 묘는 풍덕천을 지나 대지리를 거쳐야 만날 수 있다. 오늘날 꽃메교차로에서 죽전 4교 방향이다. 이 또한 ‘포은과 같은 대충신이 지나간 큰 땅’이라는 의미의 ‘대지(大地)’이다. 포은의 묘소는 모현읍에 있다. 모현읍의 원래 이름은 쇄포면이다. 그런데 포은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회오리바람에 날아가 산 중턱에 꽂혔다. 운구 행렬을 정리해 다시 상여를 옮기려 했으나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이것은 필시 하늘의 뜻이며, 포은 선생님의 마음이니 깃발이 꽂힌 곳에 묻는 것이 옳다"고 해, 사람들이 모두 동의했고 상여를 움직여 지금의 묘자리(모현읍 능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충성스럽고 현명한 학자를 사모한다’는 뜻의 ‘모현(慕賢)’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용인은 선비들이 죽어서 묻히기를 바라는 곳으로 변했을 것이며,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도 나왔으리라 추측된다.
 

서울이 조선의 정도(定都)이자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면서 용인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허균, 이일, 오달제, 남구만, 유형원, 채제공, 민영환, 이병철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묘가 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충신으로 만들었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고려의 명운(命運)이 다했다며 새로운 국가를 세워 임금으로 즉위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동의를 얻고자 노력했으며 기다렸다. 그러나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은 기다리지 못했다. 정몽주는 이방원 심복인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선지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방원이 임금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죽인 정몽주의 사면 복권이었다. 태종은 정몽주에게 최고 관직인 정1품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와 함께 익성부원군의 봉호를 내렸다. 조선의 설계자이며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죽임을 당한 후 역적으로 조선 500년 동안 복권되지 못한 것과 비교해 정몽주에 대한 태종과 조선왕조의 대우는 파격, 그 이상이었다.
 

태종은 정몽주의 성리학 이념을 치국(治國)의 도로 삼았다. 나아가 고려의 충신으로 숭상해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다. 정몽주는 비록 죽임을 당했으나, 그 이념으로 조선을 지배하고 통치한 조선의 지배자가 됐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몽주’란 이름은 645번 나오는데 13개월 재위한 <예종실록>과 마지막 왕 <순종실록>을 빼고 전 실록에 보인다. 그만큼 정몽주는 죽어서 고려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여러 사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사대부의 소원은 문묘에 배향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문묘에 배향된 사람이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였다. 
 
왕릉에 버금가는 정몽주 묘
 

포은 묘소는 공원처럼 잘 꾸며졌다. 포은의 묘소에 도달하기 전 아래에는 연안 이씨 묘들이 즐비하게 있다. 왜 한 곳에 정씨 묘와 이씨 묘가 같이 있을까? 연안 이씨는 조선 최고의 명문 집안으로 8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정몽주의 증손녀와 혼인한 조선 세종대의 천재인 저헌 이석형이 포은의 묘소 앞에 안장되면서 함께 자리를 잡은 것이다. 포은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이 글을 쓰고 김수항이 전액(篆額 : 전서체로 쓴 비신 상단부의 명칭)을 썼다. 
 

중종 12년(1517)에 건립된 묘비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고, 이방원이 추증한 영의정과 ‘익성부원군’의 봉호는 적지 않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신도비를 지나면 연못이 있다. 이석형의 묘가 보이는 곳에 위치하기에 계일정(戒溢亭)이 재현되었으면 한다. 계일정은 증손녀 사위인 이석형이 서울 성균관 서쪽에 살면서 지은 초가 정자였다. ‘계일정’이라 이름을 지은 사람은 친구 김수온이다. 
 

"(전략) 사람들은 물이 맑고 흐린 것은 잘 보지만 차고 넘치는 것은 소홀히 한다. 마음을 밝게 하여 본체(本體)의 밝음을 얻으려면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한다. 조금 삼가지 않으면 교만과 넘침이 절로 이르니 곧 사람마다 반드시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 이름을 ‘계일(戒溢)’이라 한 것이다." <계일정기>에서
 

이석형은 권력과 재물 그리고 복을 다 가진 사람으로 늘 경계하라는 뜻에서 김수온이 정자 이름을 ‘계일’이라 지었을 것이며, 현대인에게도 가슴에 와닿는 말인 듯하다. 
 

정몽주의 묘역은 엄청 넓다. 조선왕조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신의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어 충신의 본보기로 삼고자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정몽주의 묘는 병풍석과 곡장까지 두른 왕릉급 무덤이다. 원래 문인석 1쌍과 묘표, 상석, 봉분이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후손들이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석양 1쌍, 장명등 1기를 추가했다. 원래 있던 석물의 고색과 새로 만들어진 석물이 대비되는 모습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제사 기능이 강조된 충렬서원
 

묘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문현산의 자락 밑에 정몽주를 제사하는 충렬서원(忠烈書院)이 있다. 중종 때 조광조 등에 의해 성균관의 문묘에 올려진 뒤에 선조 9년(1576)에 이계를 비롯한 지방 유학자들의 뜻으로 묘소가 있는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원래 조광조와 함께 모셔지다가,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를 모시는 심곡서원이 세워지면서 포은 정몽주만을 제사하게 되었다. 
 

충렬서원은 광해왕 때 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려주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어 교육과 사회적 교화 기능을 수행하다가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는 강당과 사우만 남아있다. 강당은 1956년에 다시 지은 11평 남짓한 8칸짜리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있다. 현재도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모임 및 강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 위쪽에는 1911년에 유림에서 다시 지은 사우가 있어 포은의 위패와 포은의 손자이자 이석형의 장인인 정보, 이석형의 6대손이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자결한 이시직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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