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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톡톡톡] 힘든 시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나의 올드 오크' 켄 로치 감독 

 

칸이 사랑한 ‘블루칼라의 시인’
두 번 은퇴 선언을 했던 켄 로치 감독(케네스 찰스 로치, 1936~)이 돌아왔다. <나의 올드 오크>라는 작품을 들고서. <미안해요, 리키>(2019) 이후 4년 만이다. 올해 88세를 맞는 켄 로치 감독이 아직 세 번째 은퇴 선언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아는 이들이라면, 시네필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고 있다.

 

이것이 거장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것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기억력 감퇴와 시력 저하로 영화 작업이 어렵다. <나의 올드 오크>가 마지막 장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60년간의 작품 활동의 마지막을 암시한 바 있다.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누구인가? 영국의 소셜리스트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거장 켄 로치 감독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극단에서 활동했다. ‘BBC’에서 TV 드라마 연출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관료주의 시스템과 홈리스 문제를 꼬집은 <캐시 컴 홈>(1966)으로 영국 사회를 강타하며 대중에게 자신을 이름을 각인시켰다. 첫 장편 영화 <불쌍한 암소>(1967)로 데뷔하면서는 노동·빈곤 등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소셜 리얼리즘의 대가로 떠올랐다. 


켄 로치 감독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칸 국제영화제다.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굳건한 작품관으로 일찍부터 칸의 주목을 받았다. 노동자 소년과 매의 우정을 통해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계급의 한계를 그린 <케스>(1969)가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숨겨진 계략>(1990), <레이닝 스톤>(1993),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3)로 3번의 심사위원상을 수상함과 더불어 3번의 국제비평가연맹상(FIPRESCI), 2번의 에큐메니컬상(Ecumenical Jury)을 수상하며 칸에서만 총 10개의 트로피를 석권했다. 


칸의 사랑은 유난했다.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역사의 광풍 앞에 놓인 두 형제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과 영국 내 복지 시스템의 허점을 비판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거머쥐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번 받은 감독은 전 세계에서 9명뿐이다. <나의 올드 오크>는 그의 칸 영화제 18번째 상영작이자 15번째 경쟁 초청작으로 역대 감독 중 최다를 기록하며 명실상부 ‘칸이 사랑한 거장’ 임을 입증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 이은 북동부 영국 3부작의 완결편
켄 로치 감독은 그간 영국의 역사적 과오가 남아있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기회의 땅 미국과 혁명의 불씨를 꿈꾸는 남미 등 전 세계를 배경으로 다양한 삶의 형태를 포착해 왔다. 두 번째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돌아오면서부터는 과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직격으로 맞닥뜨린 영국 북동부 지역에 집중해 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찬사를 받는 영국 복지제도가 어떻게 약자를 배제하는지 한 목수를 통해서,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불평등 계약 앞에 놓인 현실을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택배노동자를 통해서 날카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영국 북동부 시리즈 완결편으로 불리는 <나의 올드 오크>는 2016년 영국 북동부의 한 폐광촌을 배경으로 한다.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테이브 터너)는 어느 날 마을로 들어선 낯선 버스에서 사진작가가 꿈인 시리아 소녀 ‘야라’(에블라 마리)를 만난다. 마을 주민들은 불쑥 찾아온 야라의 가족을 반기지 않는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동네가 활기를 잃었는데, 난민이 유입되면서 동네가 슬럼화하고 집값도 떨어진다고 불만들이다. 동네 청년이 망가뜨린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주면서 TJ와 야라는 올드 오크에서 특별한 우정을 쌓아간다.


야라가 카메라를 들고 동네 주민들의 일상을 찍으면서 우울함과 분노로 채워졌던 마을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TJ는 광업이 흥했던 때에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며 가족처럼 살았던 사진들을 보여준다. ‘함께 나눠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라는 구호를 실천하면서 이렇게나 따뜻하게 서로를 챙겼던 시절이 있었지만, 야라를 향한 혐오는 끊이지 않는다. 이제는 TJ에게까지 혐오의 폭력이 이어진다.

 

TJ와 야라로부터 시작된, 난민과 마을 주민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려고 했던 계획이 누전사고로 불과 일주일 만에 끝나버리고 만 것. 이 모든 것이 공짜냐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던 아이들은 “괜찮아요. 원래 좋은 건 오래가지 않거든요”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다. 힘들어하는 TJ에게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은, 바로 누전사고가 올드 오크 펍의 단골 4인방, 그러니까 TJ의 학창시절부터 친구였던 이들에 의해 ‘고의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올드 오크 펍을 닫게 된 TJ는 친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찰리, 동네 꼴이 어떤지 좀 봐. 지난 몇 년간 우리가 겪은 일들, 네가 겪은 일들, 내가 겪은 일들, 우리 아버지들이 겪은 일들을. 난민들이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망가지고 있었어. 넌 멍청한 놈이 아니잖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언제나 그들을 탓해. 약자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

 

지역사회를 지탱하던 산업이 몰락한 후 남겨진 사람들
희망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절망이 드리운다. 폐광촌의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철저한 사전 조사다. 1984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는 비효율성을 이유로 국영 탄광을 폐쇄하고, 약 2만 명에 이르는 광산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수많은 광부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2년여에 걸쳐 대규모 파업을 진행했지만, 결국 국가의 승리로 돌아가며 많은 이들은 생계를 잃었다. <나의 올드 오크>는 지역사회를 지탱하던 산업의 몰락 이후 사회로부터 단절된 마을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곳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켄 로치 감독은 그와 오랜 기간 협업했던 인권변호사 출신 각본가 폴 래버티와 영국 북동부 더럼주를 배경으로 실제 광산 마을이었던 머튼(Murton)과 호덴(Horden), 이징턴(Easington) 등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폴 래버티 작가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해당 지역의 실제 거주민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다.

 

2016년이라는 시간적 배경도 의미가 있다. 영국 정부가 시리아 난민을 처음 받기로 결정한 해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시리아 난민 가족들과 폐광촌을 떠나지 못하는 주민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들었던 켄 로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건물과 철강, 탄광을 운송하는 오래된 산업은 저물었고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만의 전통과 연대 그리고 지역 스포츠와 문화활동으로 자부심이 넘치던 공동체가 위협받은 순간, 광산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모든 정치인으로부터 잊혔습니다. 많은 가족이 떠났고,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며, 학교·도서관·교회 그리고 다른 많은 공공장소 역시 문을 닫았습니다. 일이 사라진 곳에는 희망이 빠져나가고 소외·좌절·우울이 대신 자리를 채웠습니다. 또 다른 전환점은 영국 정부가 끔찍한 전쟁으로부터 도망쳐온 시리아 난민들을 수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 비하면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어딘가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때 북동부 지역이 다른 곳들보다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 집값이 싸고 미디어가 거의 주목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켄 로치 감독은 폐광촌을 떠나지 못하는 주민이라는 공동체와 전쟁으로부터 도망쳐온 트라우마를 가진 이방인 집단의 이야기를 병치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켄 로치 감독은 “‘이러한 힘든 시대에 희망이란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어려운 질문에 관한 답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죠”라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이 두 공동체는 과연 연대할 수 있을까? 희망을 상상하는 것조차 용기를 내야 하는 이 시대에서 절망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힘든 시대에 과연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라고.

 

“연대는 자선 활동 아닌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도움받는 것”
제76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마지막 상영 직후 이어진 연설에서 켄 로치 감독은 ‘희망’을 화두로 던졌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계속 싸우다 보면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언제나 보통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희망을 이야기해 온 켄 로치 감독은 <나의 올드 오크>를 통해서 각각 다른 이유로 소외된 두 공동체의 이야기를 담으며 ‘함께’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올드 오크>의 마지막 장면은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리아에서 탈출하지 못한 야라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 마을이 애도한다. 죽음을 통한 이 눈물겨운 화합의 불씨는 두 공동체에게 서로가 타의에 의해 각자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중요한 건 소수를 구별 짓는 것이 아닌 누구나 소수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말이다. “연대는 자선 활동이 아닌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과 저항, 연대를 기반으로 한 다른 지역들도 있겠지만, 그것들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의 ‘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결집되고 단단해져서 그 집단적 연대가 어려움과 투쟁을 모두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기다려왔어요.”

 

거짓말은 나쁘다. 하지만 북동부 삼부작 완결편 <나의 올드 오크>가 그의 마지막 장편 영화일 것이라는 소식은 슬프다. 부디 이 영화가 그의 가슴 벅찬 피날레가 아니길.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은퇴작이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를 곧 들을 수 있길. 그리하여 그의 새로운 영화를 보러,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를 찾으러 극장으로 달려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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