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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만난 하이든의 ‘미사 브레비스’

키가 작고 유머가 넘치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을 당시의 사람들은 ‘파파’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하이든은 위대한 베토벤을 지도하고 편달했으며, 모차르트를 친구로 삼아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 로라우는 카를 안톤 하라크 백작이 소유한 시골영지의 중심지로 다뉴브강에서 18km 떨어진 남쪽, 빈에서는 40km 거리에 있는 라이타강 서안에 자리하고 있다. 불과 5분 남짓이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관통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지금도 이 주변의 풍경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하라크 백작의 성이다. 이 지역은 원래 독일어권이지만 크로아티아인·헝가리인·슬로바키아인 등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다.


불우했던 하이든의 유년 시절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은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이며, 어머니 안나 마리아 콜러(Anna Maria Koller)는 요리사의 딸이었다. 하이든 부부는 자그마한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서 12명의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다섯 명은 어릴 때 죽었다. 이들 부부는 1732년 3월 31일 장남이 태어나자 가톨릭 사회의 관례에 따라 아이의 생일과 날짜가 비슷한 축일을 가진 성인 두 명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란츠(Franz)와 요제프(Joseph)였으나 프란츠라는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요제프는 6세 때 노래에 재능을 보여 하인부르크(Hainburg)에 사는 먼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Johann Mathias Frank)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음악 기초교육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의 음악의 시작이었다. 요제프는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교리문답과 노래, 온갖 종류의 목관악기와 현악기의 연주법을 배웠고, 작은북까지 배웠다. 말년에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분이니, 나는 죽는 날까지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느라고 난 밥 먹듯이 매를 맞았지만…”이라고 말했다.


요제프는 천부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하인부르크 성당의 소년합창단원이 되었다. 1740년 즈음에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빈의 성 슈테판 성당의 지휘자(Kapellmeister)로 있던 게오르크 로이터(Georg Reutter)가 노래에 재능이 있는 소년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하인부르크 성당을 담임하고 있던 친구에게 아주 재능이 뛰어난 여덟 살짜리 소년이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로이터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노래할 줄 아는 소년의 재능에 감명을 받아, 성 슈테판 성당(Dom St.Stephan) 부속 합창단 학교에 입학시킨다.


천재성 드러낸 하이든의 작곡 실력
빈의 슈테판 성당에서 하이든은 본격적인 전문교육을 받았다. 라틴어·종교·수학·작문 같은 일반 과목도 계속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존경받는 전문 교사 여러 명에게 노래를 배우고, 하프시코드(Harpsichord)를 숙달하게 되었고, 바이올린도 능숙하게 다뤘다. 하지만, 하이든이 음악 이론이나 작곡을 로이터에게 공식적으로 배운 적은 거의 없다.


“그 시절 나는 종이에 음표가 빽빽이 적혀 있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좋다고 생각했다. 로이터는 내가 쓴 미숙한 결과물을 보고 비웃었다. 어떤 음성이나 악기로도 연주할 수 없을 내용이었으니, 그는 내가 성부 두 개로 작곡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열여섯 성부로 작곡했다고 야단쳤다.”


하이든은 습작 미사곡의 규모를 놓고 로이터와 언쟁을 벌였는데 이 일로 둘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변성기가 온 그는 1749년 11월에 성 슈테판 성당에서 나오게 된다. 그는 성직에 들어가기를 권유하는 부모님이 있는 로라우의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빈에서 직업 음악가로 살아가기로 했다. 성 슈테판 성당의 합창단을 떠난 뒤 하이든은 생활고에 힘들었다. 거처도 없이 굶기가 일쑤였다. 황궁 가까이 있는 미하엘 성당의 테너인 요한 미하엘 슈펭글러는 그런 그를 불쌍히 여겨 미하엘 하우스의 다락방에 살게 해주었다. 난로도 없고 지붕에서는 비가 새는 이 다락방에는 슈펭글러의 부인과 갓난아기도 함께 살았다. 1749년의 것으로 날짜가 쓰인 ‘F장조 미사 브레비스(Hob.XXII:1)’는 아마도 하이든이 이 다락방에서 썼을 것이다. 그는 1776년에 쓴 자전적인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이 시기에 관해 썼다.


“마침내 목소리가 변성기에 이른 뒤 나는 장장 8년 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비참한 삶을 이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필요에 의해 일상의 빵을 얻어야 하는 이런 비참함으로 인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게 되어 수많은 천재가 망쳐지곤 한다. 내게도 똑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밤을 새워 작곡에 대한 열정을 단련하지 않았더라면 내 변변치 않은 업적도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근면하게 작곡했지만 올바른 방식을 제대로 몰랐다. 운 좋게도 유명한 포르포라(Porpora)로부터 진정한 작곡의 기초를 배울 때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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