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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법 예술의 극치, 바흐 ‘음악의 헌장’

18세기 독일의 여러 왕들은 통일보다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자리와 교황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더구나 신·구교도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결과로 제후국들이 완전한 자치권을 얻게 됨으로써 통일은 더욱 희박해졌다.


그런데 이 무렵, 지금의 베를린 지방에 있던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의 통일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프로이센은 본래 여러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으나, 차츰 힘을 길러 영토를 넓혀 나갔다. 18세기 초에 프리드리히 1세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도읍을 베를린으로 정하였다. 그 후 프로이센은 중앙 집권을 확립하고 강한 군대를 길러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년) 때에는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 올랐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위 초에 오스트리아와 싸워 슐레지엔 지방을 손에 넣는 한편, 프랑스 등 선진국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교육과 산업 발전에 힘을 기울여 독일의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또 ‘왕은 국가 제일의 종이다’라고 한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의 복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곧 산업의 진흥과 교육 및 학예를 장려함으로써 독일의 의식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켜 위대한 문인·학자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바흐 팬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1747년 그의 나이 62세 때 둘째 며느리가 낳은 첫 손자를 보기 위해 베를린에 갔다. 그의 둘째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C. P. E. Bach, 1714~1788)는 음악 애호가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클라비어 반주자로 일하고 있었다. 대왕은 노대가(老大家) 바흐가 베를린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그의 음악을 듣고자 했다.


그해 5월 7일 일요일, 대왕은 예나 다름없이 손수 플루트를 들고 악사들의 반주로 협주곡을 즐기고 있던 차에 바흐가 포츠담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보고받았다. 바흐는 여장을 풀 사이도 없이 궁전으로 안내되어 대왕의 자랑인 최신식의 지르바만 클라비어를 몇 개 시험 연주한 다음 대왕이 스스로 내어 준 테마로 리체르카레(Regis Iussu Et Reliqua Canonica Arte Resolluta)를 즉흥으로 연주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는 왕이 6개의 오블리가토 성부를 가진 푸가(fuga)를 듣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가지고 바로 연주해 보임으로써 왕을 비롯하여 참석했던 음악가들을 감탄하게 했고, 다음 날 베를린으로 돌아와 신축한 오페라극장의 음향을 시험하고는 라이프찌히로 돌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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