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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창가에서] 무듬이 들에 선 남해아이들

가을비 그친 다음 날 파란 하늘을 보듬은 하동 평사리 무듬이 들판. 짙은 겨자색 가을이 남해 섬 아이들의 가슴에 동화로 물들기 시작한다. 섬진강변 무듬이 황금 들판엔 말라가는 콩 이파리가 바람에 수런거리고 곳곳엔 바람의 흔적이 실루엣으로 남아있다. 무엇을 새기려고 했을까? 
 
남해는 섬이다. 마늘농사로 인한 빠른 추수로 남해에서 넘실거리는 가을 들판을 보며 걷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햇볕 좋은 가을날 그늘 없는 넉넉함이 아이들의 얼굴에 배어난다. 공부, 학원, 스마트폰에 시달린 몸과 눈이 숨표와 쉼표를 찍는다. 

익어가는 가을을 함께 걷는 길

넓은 들길은 엄마의 품 안이다. 형제봉을 바라보며 부부송과 동정호를 지나는 동안 아이들의 걸음은 느려진다. 친구끼리 도란도란 가을 이야기도 나누고 유리알보다 투명한 물길도 보고 앞서가는 친구의 어깨도 건드려 본다. 빠름이 잦아드니 모든 게 여유롭고 행복하다. 오늘 아이들은 무듬이 들 가을 무대에 주연이 된다.
 
허수아비가 늘어선 들길을 지난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며 까르르 웃는 웃음이 옥구슬처럼 메아리친다. 조금 더 거닐고 싶지만 아쉬움을 달래며 박경리문학관으로 향한다. 오르는 길 양옆에는 배꼽부터 붉게 번져가는 대봉감이 주렁주렁 반기고 있다. 
 
우리 아이들 마음이 참 예쁘다. 구부러진 허리에 홍시 감 함지를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가 보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녀석은 함지를 들고 다른 한 녀석을 떨 채를 들고 할머니를 따라간다. 잠시 뒤 풍겨오는 단내와 시큼함. 할머니가 주셨다며 홍시 감을 입가에 가득 묻힌 채 걸어온다. 
 
이틀 전 일이 떠오른다. 네 명의 아이들과 텃밭에 심은 목화에서 솜을 뽑고 어린 다래를 따왔다. 그리고 다래가 이런 맛이라며 맛을 보자고 했다. 어린 다래 속살을 잎에 넣자 달착지근하면서도 약간 떫은맛이 유년의 기억을 불러온다. 하지만 아이들은 금세 뱉어버리며 이게 무슨 맛이냐 한다. 먹거리 많고 인공 감미료에 길든 요즘 아이들의 입맛이 안타까웠다. 이제 이런 기억은 영원히 잊힐 것이다. 
 
설령 이뿐일까? 소설 토지 속 간난 할멈의 장례식 날, 열두 상두꾼이 멘 상여의 상두채에 올라서서 앞소리 하는 서서방의 상두가도 들을 수 없다. “어하넘 어하넘 어나라 남천 어하넘~.” 시대가 바뀌고 삶이 변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넉넉함, 쉬어감의 감성 싹 트기를 

박경리문학관과 최참판댁에서도 가을은 진하게 배어난다. 안채에서 사랑채로 통하는 담장 가에 물들기 시작하는 주홍빛 감잎이 미루나무 꼭대기 뒤로 물러선 파란 잉크 빛 하늘에 대비돼 아련한 문신으로 남는다. 푸기 어린 아이들은 별당, 안채, 사랑채를 거닐며 소설 속 배경에 빠진다. 
 
앞날은 이 아이들의 무대다. 가까이 보면 빨라지고 수평선과 지평선보고 달리면 너른 마음이 된다. 이 마음은 서로를 감싸주고 보듬게 한다. 이게 느림의 미학으로 만나는 길 위의 인문학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황금빛 무듬이 들길을 걸은 기억이 아이들의 마음을 넓게 하고 빠름과 느림이 필요한 순간을 아는 비교의 감성으로 싹 트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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