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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 칼럼] 자유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요즘 읽은 책 가운데, 오래도록 생각의 그늘을 드리우게 하는 책이 있다. <시대의 소음(The Noise of Time)>이라는 책이 그러하다. 세계적인 전기 작가 줄리안 반스(Julian Barns)가 소련 체제하의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1906~1975)의 생애를 소설 방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나는 이 책과 더불어 참으로 오랜만에 ‘자유’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은 ‘자유’라는 주제를 인간존재·이데올로기·예술·권력 등의 주제들과 서로 맞물리게 하면서, 인간의 의미·자유의 의미를 다성적(多聲的) 울림으로 빚어낸다.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쇼스타코비치)는 세 시간 동안 아파트 승강기 옆에 내내 서 있었다. 줄담배를 다섯 대 피웠고, 마음은 어지러웠다. 아파트에서 의자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자가 있더라도 초조해서 서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앉아서 승강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도대체 이 장면은 무엇인가. 왜 주인공은 이렇게 밤마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 들고 아파트 승강기 옆에서 오랜 시간 서 있는가. 떠나지도 않으면서 매일 밤 이러고 있단 말인가. 작가인 줄리안 반스(Julian Barns)는 워낙 생략과 비약 그리고 도치 기법을 많이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사태를 바로 보여주지 않고 점진적으로 드러나도록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래서 내가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없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주인공 쇼스타코비치가 고통스럽고 두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 천재이다. 독재자 스탈린 정권의 눈 밖에 난 그는 음악활동을 금지당하면서, 이제는 언제 끌려가서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자유가 사라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무자비한 폭력과 공포의 숙청을 이어나간다.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와 동료 음악가들도 하나씩 끌려갔다. 그는 자신에게도 그런 운명이 닥쳐오는 것을 예감한다. 밤에 집 안에 들이닥친 기관원들에게 자다가 끌려가는 모습을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이기 싫어서, 본인이 모든 행장을 준비하여 아파트 승강기 옆에서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체포와 호송은 밤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1936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작곡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당의 사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형식주의 예술관에 빠졌다고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두 차례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 분위기에서 당시 소련에서는 600명 이상의 작가·예술가들이 수용소로 쫓겨 가거나 피의 숙청을 당하던 시대였다. 그 후로 쇼스타코비치는 스스로도 “공포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듬해 제5번 교향곡 <혁명>을 발표하고, 이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담았다고 평가받음으로써, 그는 당의 비판을 수용하고 잘못된 태도를 교정했다고 인정받았다(<소음의 시대>, 265쪽 참조). 공산당으로부터 평생 비난과 환대를 동시에 받았던 그는 마치 두 줄 타기 광대와도 같은 이중성을 그 내부에 가졌는지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 앞에서 비겁하기도 하고, 환대를 해 주면 그들을 위해 영웅의 가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작가는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이 끊임없이 어떤 이중성에 시달리는 것을 예리하게 추적한다. 스탈린 시대 말기 소련은 쇼스타코비치의 사상 개조를 위해서, 그에게 사상 재교육 겸 감시 멘토(mento)에 해당하는 트로신이라는 인물을 보내어 같이 있게 한다. 트로신과 쇼스타코비치의 대화 장면 하나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트로신 동무와의 정중하고 따분하면서 기만적인 대화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 오후 트로신이 쇼스타코비치에게 물었다.
“몇 년 전 스탈린 원수가 당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얘기가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스탈린은 정말 위대한 분이군요! 온 나랏일을 다 보살펴야 하고, 모든 일을 다처리해야 하는데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 까지 알고 계시다니 말입니다. 세상의 절반을 지배하시면서도 당신에게 시간을 내어주시는군요!”
“예, 예, 정말 놀랍지요.”

그는 열성을 보이는 척하며 맞장구를 쳤다. 트로신이 말했다.
“당신이 유명한 작곡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위대한 지도자와 비교한다면 당신은 어떤 분일까요?”
“위대하신 지도자에 비하면 저는 벌레지요. 벌레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진짜로 벌레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당신은 건전한 자기비판의식을 갖게 된 듯해서 다행입니다.”


자유가 말살당한 황량한 풍경을 볼 수 있다. 굴종의 극한이 따로 있겠는가. 이 책을 소개할 때 어김없이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영웅이 되기보다 비겁하기가 더 어려웠다.” 쇼스타코비치 내면의 독백을 임팩트 있게 표현한 말이다. 읽으면서 실감하게 된다.


‘자유’의 유의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자재(自在, 속박이나 장애 없이 저절로 마음대로 존재하는 것)’ 또는 ‘자적(自適, 아무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누리고 도달하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도를 깨친 부처님이나 신선의 경지가 연상된다. 모순 가득한 인간 존재의 조건에서 비추어 보면 도저히 이르지 못할 이상의 경지로 보이기도 한다.


‘자유’의 반의어로는 ‘구속(拘束)’, ‘속박(束縛)’ 등이 있다. ‘붙잡아서 꽁꽁 묶어 놓는다’는 뜻이다. 신체가 묶여 있는 상태를 자유의 반대 개념으로 잡아서, ‘자유’의 반의어로 사용해 온 것이라 생각된다. ‘자유’란 말 안에 내재하는 깊고 오묘한 이상적 가치를 생각하면, 이런 반의어들이 ‘자유’란 말의 파트너가 되기에는 무언가 함량이 모자란다는 생각도 든다.


현실에서 ‘자유’를 망가뜨리는 공적은 ‘폭력’이다. 폭력에 휘둘리면서 자유를 구가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유는 충분히 망가진다. 폭력 앞에 놓인 사람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때문에 자신이 비겁해지고 나약해지는 것, 이것만으로도 자유는 설 자리가 없다. 쇼스타코비치가 겪었던 부자유는 제도와 이념과 체제가 개인에게 가해 온 이를테면 위로부터의 폭력이다. 그가 겪었던 대로 우리 존재를 두려움과 불안과 비겁으로 몰아넣는 것은 자유의 적이다. 이런 부자유를 몰고 오는 양태가 오늘날 열린 체제의 사회에도 있다. 그것은 ‘옆으로부터 오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흔히 목도하는, 한 개인에 대한 악성 댓글은 폭력의 일종이다. 악성 댓글은 무조건 상대를 감정으로 정죄하고 그에게 항변의 기회를 합리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민재판에 비유된다. 당사자의 자유의사 표명 자체를 초토화 시킨다. 대개는 조절되지 않는 분노와 저주와 욕설과 인격살인이 횡행한다. 집단 히스테리의 모습도 비친다. 악성 댓글들로 인해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댓글은 원래 대화를 살리려고 만든 소통의 장치이지 않은가. 악성 댓글은 가장 반대화적(反對話的)인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악성 댓글에 시달린 사람은 받은 상처와 두려움으로 자신을 변명할 의욕조차 상실한다. 그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비겁해진다. 스스로를 굴욕의 감방에 가둔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을 감독하는 자에게 “나는 벌레 같은 존재이다”고 말하는 대목이 바로 그러하다. 이런 소통 생태를 가진 사회는 자유가 조금씩 망가져 가는 사회이다. 집단 광기의 협박과 욕설로 얼룩지는 소통 행태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생기는 댓글 폭력은 수평관계에서 생겨나는 폭력이다. 수직의 권력 관계에서 생기는 폭력과는 성질이 다르다. 그러나 자유를 위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또한 ‘시대의 소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소통의 자유를 위한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 필요하다. 오래 잊고 지냈던 ‘자유의 이상’을 새롭게 각성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자유의 이상적 구경(究竟)을 마음에 품어 본다. 자유가 활기 있게 숨 쉬는 사회는 불평이 없다.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다. 비교에 눈이 멀어서 스스로 우울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도 적다. 자유란 단순히 억압받지 않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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