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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0대 초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을 하다가 살짝 바람이 들었다고 할까. 프로듀서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대학 시절 학점은 밑으로 깔면서, 방송국 동아리에 푹 빠져 활동했던 경험이 나를 충동질했던 탓도 있다. 경쟁률이 높았지만 운이 좋았는지 합격했다.


그러나 운이 좋은 것은 여기까지였다. 방송국 출근 첫날부터 나의 시련은 시작 됐다. 고참 PD들이 나를 다룬 방식은 혹 독했다. 1970년대 충무로 영화판에서 조 감독을 했던 나의 상사 PD는 막강한 현 실주의자였다. 그는 텔레비전 방송에 대 한 나의 무지를 한심하다는 듯이 나무랐 다. 혼잣말처럼 하는 불평이지만 늘 내게 들리도록 불평했다. “이 판에서 살아남으 려면 세상 물정에 빠삭해야 하는데, 너 같 은 순진덩어리는 답답하기 그지없다”라는 푸념이 빠지지 않았다. 나 또한 속으로 그의 빈곤한 독서와 썰렁한 교양, 그리고 이해(利害)에 민첩한 현실 본능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당연히 일터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방송국 동료나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개 신문방송학과나 연극영 화과를 졸업했다. 정통 방송인으로서 자 부심도 강했고, 그만큼 자기들끼리 단단 한 학맥과 인맥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따라서 국어 선생이나 하다가 온 나를 ‘외계인’으로 치부했다. 공통 화제 안 에 나를 끼워 주지 않았다. 공식 회의 때도 그러했고, 비공식 회식 때도 그러했다. 나는 왕따였다. 질곡을 벗어날 방책이 없 었다.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 기 시작했다. 그것이 방책이라면 방책이 었다.


소외의 극한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방송국은 삭막한 곳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경쟁과 끝없는 평가, 그리고 묘한 문화적 허영과 과시가 방송국 사람들의 문화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방송 국을 역동적 공간으로 만들기도 했다. 허영은 자존의 얼굴이고, 과시는 도전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역동의 구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나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어찌어찌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 꿈의 내용이었다. 꿈이었지만 정말 나는 잘된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꿈에서 나는 희열에 차서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있었다. 꿈을 깼을 때의 막막함이란! 그 야말로 ‘꿈은 사라지고’를 이처럼 허망하고 여실하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나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그까짓 것 당장 때려치우렴. 뭐 그런 고약한 동네가 있어. 웃기는 놈들이군. 그 나쁜 상사와는 일을 못하겠 다고 근무 변경 신청을 해 보라니까. 그놈도 조사해 보면 무슨 비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니까.”


일단은 후련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위로도 필요했다.

“일단은 좀 쉬도록 해. 그렇게 지내다가는 네 몸과 정신이 견디지 못할 거야. 잠시 휴직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는 사이 학원 같은 곳에 일자리를 알아봐 줄게.”

정말 나를 걱정 해주는 위로가 아닌가. 마음이 뭉클해질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위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내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J선배를 찾아갔다. 아니 그의 집 부근에 가서 포장마차 집으로 나오시게 했다. 그는 대학 선배이며, 동아리 선배이며, 학군단 장교 선배이기도 하다. 따뜻한 성품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분이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다. J선배이면 내가 원하 는 위로를 맞춤형으로 제공해 줄 것이라 고 생각했다.


나는 J선배를 만나 저간의 고단한 형편 을 이야기했다. 특히 내 마음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선배는 충분히 공감하며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다. 그러나 거기까 지였다. 선배는 공감은 해줬지만 각별한 위로 메시지를 달리 쏟아내지는 않았다. 말을 아끼고 있는 듯한 선배에게 내가 재촉하듯 말했다.


“선배님 판단은 어떠세요? 제게 도움이 될 말씀을 좀 해주세요.”

“나쁘지 않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나쁘지 않다고, 나쁘지 않아! It’s not bad.”

“아니 이게 좋다고요? 이게 좋은 상황이라고요?”

“내가 언제 좋다고 했나, 나쁘지 않다고 했지. 자네가 자네 입으로 ‘나쁘지 않다’ 라고 말해봐. 나쁘지 않다라고 말하기 시 작하면 신기하게도 나쁜 것들이 조금씩 안 보이기 시작한다네. 그리고 나는 말이야 실제로 지금의 자네 상황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봐. 그 이유를 여기서 따지지는 말게. 그저 그냥 ‘나쁘지 않다’ 를 무슨 화두(話頭)처럼 마음에 두고 꾸준히 중얼거려 보게나. 안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사표는 찢어 버리고 말이야.”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의지가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

잘 알려진 이야기를 끌어와 보자. 유명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신발 마케팅을 하려고 A사원과 B사원을 각 각 현지에 파견했다. 이들이 가보니 막상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았다. A는 절망했다.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신발을 팔아먹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회사에 그렇게 보고했다. 반면 B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원주민들이 신발을 신기만 한다면 신발을 무한정 팔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 다. B는 회사에 잠재력을 가진 시장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회사는 B를 아프리카 시장 개발 책임자로 명했다. 그는 이후에 당연히 대단한 성과를 냈다.


‘나쁘지 않아!’는 긍정의 마인드를 이끌어 올린다. 나쁜 상황을 해결하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힘이 있다. 좋은 상황에서 긍정의 마인드는 누군들 못 가지랴! ‘나쁘지 않아!’에는 아주 단단한 반성의 심리가 숨어 있다. 그것은 나쁜 상황을 내 탓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반성으로 통한다. 반성의 에너지는 강력하다. ‘나쁘지 않아!’는 성격을 좋게 만든다. 자신의 내면에 우울이나 불행 마인드가 깃을 치고 들어올 수가 없도록 이끌어 준다.


들어가서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 문이다. ‘나쁘지 않아!’는 길게 보도록 한다. 지금 눈앞의 현실을 뛰어넘어 보겠다는 의지가 있기에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나쁘지 않다’는 판단은 그 자체로 장기적인 전략을 수반한다. ‘나쁘지 않아!’에는 감각에 지배 되거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멘탈이 이미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자기도취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리더는 ‘나쁘지 않다’를 자주 말해야 ‘나쁘지 않다’를 찾아내는 힘, 그 자체 가 창의적 역량이다. ‘나쁘다고 버리는 사 람’과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 리는 사람’ 사이의 창의력은 차이가 크다. 그 대상이 사람일 때는 더 그렇다. ‘나쁜 사람’을 나쁘게만 보면 인간 구원은 없다. 그에게서 ‘나쁘지만은 않은 면모’를 찾아 주는 사람이 훌륭한 친구이고 위대한 스승이다.

리더는 ‘나쁘지 않다’를 자주 해야 한

제로 사태는 나빠진다. ‘나쁘다’는 객관과 ‘나쁘지 않다’는 주관은 반드시 모순되게 만 만나지 않는다. 객관과 주관은 알게 모 르게 우리들 의식 내부에서 서로 내통하 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말로 내뱉는 순간 더욱 그렇게 된다. 그래서 주관이 객관을 바꾼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이순신의 기 적이 이를 입증한다. 이순신의 확신 또한 ‘나쁘지 않다’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방송국에 입사하여 곤경에 있던 나에 게, 내 형편이 ‘나쁘지 않다’라던 J선배의 조언은 참으로 유효했다. 물론 나는 사표 를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는 편성국장을 맡으라는 사장의 권유를 받 았다. 나는 옛날의 왕따를 훌쩍 극복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를 자주 말하자. 이 말이 정 말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을 자주 사용하는 나의 정신적 정체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란 사람의 내면에 자라고 있는 긍정적 자아를


‘나쁘지 않아!’에는 신중함의 모드가 들 어 있다. 현상을 피상적으로만 보려는 사 람에게 나쁜 현상은 그냥 나쁘게만 보일 뿐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려면 눈에 보이는 피상적 현상, 그 안으로 깊이

다. 그것으로 구성원들에게 힘을 줄 수 있 다. 학생을 나쁘다고 해야 할 자리에서 가 끔 ‘나쁘지만은 않다’를 말해 보라. 어떤 가능성의 힘을 학생과 교사가 공유하게 될 것이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

문득 경이롭게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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