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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한 시절 ‘나는 열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지낸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열정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인가. 개인적 경험을 말하라고 한다면 답이 없지는 않겠지만, 두루 이해할 수 있는 총체적인 답을 하라면 좀 막막하다. 이제껏 열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음을 발견하게도 된다. 열정에 대해서 대개는, 어떤 치열한 경험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상식으로 아는 정도이다. 예컨대 ‘열정은 소망을 향한 의지적 노력이며, 성공과 행복을 이루게 한다’ 등과 같이 말이다.


‘열정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인가. 답을 만들어 본다. 역간 순환 논리이다. 열정을 가졌다면 마땅히 그 열정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열정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열정으로 사는 구체적인 실천, 그 자체 아닌가. 열정(熱情)이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나 행위이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동어반복 같은 설명이지만, 열정은 열정이기 때문에 드러낼 수밖에 없다. ‘사랑’이 열정을 대표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라는 터키 속담이 있다. 인간의 열정이란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말이다.


다시 나에게 묻는다. 열정을 겉으로 드러내다 보면 ‘열 받는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경우는 없었던가. ‘열 받는 상태’가 꼭 분노를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냉정을 밀어내는 어떤 작용인 것은 분명하다. 또 자문해 본다. 열정의 절대성에 소신을 실은 나머지, 그 못지않게 더 소중한 것을 무시하거나 패스해 버리지는 않았던가. 열정이 후회로 이어지던 경우는 없었던가. 물론 그 후회는 의미 있는 시행착오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열정은 ‘열 받는 것’과는 다르다.


‘열정을 발산하는 것’과 ‘열 받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 열정은 지속되기 어려운 열정일 가능성이 크다. 일종의 ‘가짜 열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열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데에도 지혜와 기술이 필요하다. ‘열정’이란 말, 그 말 자체로서야 조금도 흠결이 없겠지만, 그 말이 인간의 욕망이나 행위로 들어오는 순간, 열정은 흠결이 나기 시작한다.

 

러시아가 낳은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은 세계 문학의 마당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라는 시구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문학적 재능은 물론이요, 러시아 민중의 현실에도 남다른 각성을 가졌던 소설가이다. 푸시킨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열정을 발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예술 창작의 몰입에서 발휘해야 할 열정이, 현실 생활의 욕망으로 뻗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열정은 ‘열 받는 상태’로 드러나곤 했다.


푸시킨은 아내인 나탈리아 곤치로바를 열정으로 사랑했다. 곤치로바는 당시 러시아 사교계에서 알려진 미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마침 프랑스에서 온 장교 출신의 단테스가 그녀를 좋아하는 기미를 알고, 푸시킨은 열에 받쳐서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상대는 군인이다. 권총 결투에서 푸시킨은 먼저 총을 맞고 죽는다. 그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다. 열정의 푸시킨이 이렇게 죽은 후, 아내 곤치로바는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아예 러시아를 떠나 버린다. 이런 열정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열정의 종말이 이렇듯 헛헛해서야 되겠는가.


사실 ‘인간의 열정’이란 원래 좀 위험한 것이 아니었던가. 열정 때문에 인생이 무너지는 경우는 참으로 많다. 아니, 열정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잘못된 열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열정을 진짜 열정으로 믿는 데서 오는 인생의 시행 착오들이다. 아무튼 ‘열정’과 ‘열 받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생론의 자리에서 분간하는 데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 열정의 숨겨진 본명은 ‘어리석음’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빠져서 갇혀 있는 감정에 엉뚱스럽게 매몰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소위 열정’ 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도덕적 오류는 지천으로 흔하다. 앙드레지드의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소설이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주인공은 기성의 권위와 인습과 교육에 따라가며 열정 없이 산다. 그러다 큰 병을 앓게 되면서 자신의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크게 각성한다. 이제부터는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자기 이상을 행동으로 나타내려 한다. 이른바 ‘각성된 열정’이 생긴 것이다. 그의 열정이란 ‘절대 자유’를 추구하려는 열정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열정은, ‘절대 자유’를 절대 가치라고 믿으면서 도덕적인 오류를 범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공동체로 살면서 지켜야 할 도리를 무시한다. 절대 자유를 즉각 행동으로 실현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양보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결국 아내를 죽게 하고 자신마저도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인격적 파탄에 빠진다.


자기 안의 열정을 마냥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은 열정을 빙자하여 자신의 오류 없음을 하늘 끝까지 믿는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마치 심판자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나무라고 그의 죄를 벌하려 한다. 그리고 나의 정죄(定罪)는 어디까지나 타당하다. 자기 안의 열정이 이를 증폭시킨다. 인류사에서 실패한 ‘급진적 혁명들’은 잘못된 열정이 생산한 도덕적 과오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열정은 한순간의 감정 상승 모드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열정을 지속적으로 영위하게 하는 힘은, 그리고 열정을 오라(aura)로 번지게 하는 심리적 자세는 아이러니하게도 ‘냉정’이어야 한다. 열정에 대한 냉정한 감시는 또 필요하다. 열정의 순수성을 훔치려는 기미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순수하다. 그러나 그 순수는 지켜서 높이기가 만만치 않다. 열정의 순수를 자랑으로만 내세우기는 어딘가 찜찜하다. 열정을 비롯한 모든 순수는 다른 사악함에 휘둘리기 쉽다. 열 받는 열정이 스스로 화를 초래하는 어리석음으로 기울 염려가 있다면, 순수를 표방하는 열정은 남에게 이용당하는 어리석음으로 기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열정 페이’라는 신조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열정 페이’는 열정(熱情)과 페이(pay)가 결합한 신조어다. 나의 열정(내가 좋아하는 일)이므로 돈 받지 않고 일을 해준다는 뜻이다. 즉, 나의 열정을 ‘돈(pay)’ 대신 주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세태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느새 좋아하는 일을 시켜주었으니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맥락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의미가 확대되어 청년층의 저임금 노동착취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한국에서도 열정 페이와 함께 블랙기업 등 청년층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면서, 열정 페이를 제재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다음 백과사전). ‘열정’이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추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열정’이 중립적 언어가 되면 좋겠다. 즉, 좋은 말이기도 하고 나쁜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생론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열정을 절대 덕목처럼 생각하게 되면, 유아독존에 이르게 된다. 젊은이의 절대 열정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서 마침내 자아를 잃기 쉽고, 늙은이의 절대 열정은 남을 돌아보지 않아서 완고해진다. 열정주의보를 내리면서 다음의 두 명언이 우리 안에서 서로 동반하여 자라나기를 기대한다.


하나는 게오르크 빌헬름의 말이다. “이 세상에 열정 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것은 없다(Nothing great in the world has been accomplished without passion).”


다른 하나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스스로의 열정을 지배하는 사람이다(Who is powerful? He that governs his pa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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