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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탓하지 않음’의 미덕

작년에 유행한 신조어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나 최저임금 인상 같은 굵직한 정책들도 결국엔 소확행 혹은 워라밸(work-life balance, 업무와 여가의 균형을 의미) 같은 신조어가 상징하는 시대정신 속에서 추진됐다. 소확행에서 파생된 신조어가 하나 더 있는데 ‘소확횡’이다. 의미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이다.

 

소확횡 정신에 따르면 화장실은 반드시 업무 시간에 가야 한다. 그래야 용변을 보면서도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일종의 ‘업무 시간 횡령’이다. 이외에도 사무실에 있는 필기도구나 복사용지를 제 것처럼 사용하는 ‘소심한 횡령’들이 소확횡에 포함된다. 사무용품 횡령도 심해지면 엄연한 범죄가 되기에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소확횡이라는 유행어가 상징하는 시대정신은 분명 존재한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가늘고 길게 살자’ 정도일까?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 “직장 생활 속에서 소확횡을 실천하자”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계정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 회계 사건을 비난하는 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일상처럼 일어나는 일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내로남불’이랄까? 힘없는 직장인은 어떤 경우에도 을(乙)이고, 언제나 횡포를 일삼는 대기업은 모든 경우에 갑(甲)이라는 게 현재 대한민국의 정설이다. 그렇게 우리는 ‘남 탓’을 하는 국민이 되어간다.

 


국가를 부도낸 사람은 누구인가
2018년 12월에 개봉해 흥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도 비슷한 정신을 담고있다. 인터넷에서 이 영화의 별명은 ‘헬조선의 시작’이다.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외국인 노동자는 핍박받으며, ‘취업 전선=생존 전선’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이 어디서부터 태동됐는지가 이 영화 안에 있다는 의미다.


막상 이 영화의 관점에 동의해주기 힘든 첫 번째 이유는, 영화 안의 인물들이 너무도 단순한 선악 구도로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재정국 차관은 틈만 나면 여성 비하 발언을 일삼고 재벌에 아부하며 나라를 미국에 팔아먹으려 안달이 난 악당쯤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은 세상에 정말 그런 ‘단순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은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단순하고 악랄한 인간이 있어야 우리가 누군가를 마음껏 미워할 수 있고, 그래야 보는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는) 확실한 악당 몇 명을 미워하는 것으로 그 엄청난 사건의 의미를 축소시켜 버린다. 리얼한 역사를 응시하는 대신 가상의 영화를 보며 그때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길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학교라는 상아탑 안에서 공부를 하고, 언론을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볼 땐 나도 공무원이 그저 무능하고 안일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물론, 똑똑한 젊은 세대가 꿈을 찾을 겨를도 없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막상 사회에 나와서 만나본 공무원들의 상당수는 애국자들이었다. 마음먹고 찾으면야 무사안일주의에 찌든 공무원이 왜 없겠느냐마는, 적어도 기획재정부에서 나라 전체의 정책을 고민하는 사람 치고 나름의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국가부도의 날’이 내포한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이렇게 나라 걱정을 하며 이름 없이 헌신하는 수많은 관료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인들의 ‘정의로운 척’을 위해 애먼 사람들을 ‘무능한 관료’로 만들어버린 이 태도야말로 영화 속 공무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사안일주의가 아닐까?


당시 상황에서 IMF(국제통화기금) 말고 다른 대안이 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의롭고 똑똑한 김혜수(한시현 역)마저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 나중에 가서 한다는 얘기는 그저 ‘IMF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얘기일 뿐이다. 중요한 역할에서 배제된 뒤 김혜수가 하는 일은 IMF와 협상을 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 보고서를 쓰는 것뿐이다(팀원들은 팀장을 잘못 만나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 와중에 ‘저녁이 없는 삶’을 산다).


우리 중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게 국가정책이고 경제의 기본이다. 복잡다단하게 펼쳐져 있는 그때의 현실 속에서 완전무결한 선택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의 소산이다.


영화의 주장에 따르면 몇몇 무능하고 악랄한 관료들과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대기업들이 모피아(MOFIA)를 형성해 당시 나라 경제를 말아먹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단순화는 숙고의 여지를 거세시키고 우릴 그저 남 탓이나 하는 우민으로 전락시킨다. “국민들은 그저 개돼지다”라는 말에 흥분했던 당신이라면, 우리를 단순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이런 시도에도 분노해야 마땅하다.


‘남 탓’은 복잡한 인생을 단순하게 살도록 만들어 준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우리의 삶을 조금도 진전시켜주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안고 있다. 부디 2019년은 남 탓하지 않는 한 해가 되길. 소확횡 정도는 괜찮겠지만 더 이상 우리의 도덕성까지 횡령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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